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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머] 뻔한 경험들 '그럴싸한' 자소서로 포장하기

입력
2015.09.11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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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인사 담당자는 포스코에 들어오고 싶으면, 자기소개서에 ‘비빔밥 같은 인재’라는 단어는 쓰지 말라고 조언한다. 너무 뻔해서. 얼마나 많은 지원자들이 자신을 ‘비빔밥 같은 인재’라고 소개했기에 비빔밥이 자기소개서 금지어가 된 걸까. 자기소개서는 사실 뻔해지기 힘든 글이다. 우리는 다른 하루를 살고, 다른 일 년을 산다. 다른 사람들이지 않나. 이론상으론 그런데, 실제론 자기소개서만큼 뻔해지기 쉬운 글도 없다. ‘뻔한 자기소개서는 탈락’시킨다고 A기업 B기업 등 인사담당자들이 경제지에 대고 주구장창 인터뷰를 하니 백지의 이력서를 앞에 두고 손가락이 굳는다.

재밌는 걸 발견했다. 백지의 이력서를 앞에 두고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 당신을 위한 프로그램. 자소서 자동완성기다. J 채용정보 사이트에서 제공 중이다. '작문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이 자동완성기. 소개를 한 번 볼까?

"자기소개 항목별로 제공되는 다양한 샘플 중 본인에게 맞는 샘플을 선택하면 자동으로 자기소개서가 완성되고, 편집까지 가능한 서비스"

성장과정, 좌우명, 성격의 장단점, 학창시절/경험, 지원동기 등의 항목이 제공된다. 예를 들어 아르바이트 하면서 경험한 일을 자소서의 소재로 삼고 싶다면 학창시절/경험/아르바이트 항목을 누르고 '샘플 문장'을 선택하면 된다. 물론, 샘플 문장은 여러 개가 있다. 개중에 맘에 드는 문장을 택하고, 수정해서 자기소개서를 완성하면 된다. 9월 11일 현재, 약 89만회 가량 이 페이지가 이용되었다. 자기소개서 작성이 취업준비생들에게 얼마나 큰 고충인지 느껴지는 숫자다.

자기소개서 완성, 참 쉽죠?
자기소개서 완성, 참 쉽죠?

자소서 자동완성기가 제공하는 샘플 문장 옆에는 사람들의 선택 빈도수가 뜬다. 가장 많이 선택된 문장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보편적 경험이 읽힌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미덕으로 만들어내는지도.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걸 어떻게 ‘자소설’로 포장해내고 있을까.

사회경험/해외경험/아르바이트 항목에서 최다 선택 수를 차지한 문장은 꼭대기에서 네 번째까지 모두 아르바이트에 관련한 것이다.

'대학교 시절 아르바이트를 통해 용돈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동시에 다양한 경험과 어떤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적극성, 책임의식 등을 배웠습니다. (2291회)'

'대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독립심을 길러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레스토랑 서빙을 시작으로 편의점, 서점, 사무보조, 학원, 과외 등의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함으로써 금전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을 배우고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2103회)'

'저는 많은 아르바이트를 해보았습니다. 가장 큰 목적은 용돈이었지만 아르바이트를 통해서 사회활동을 많이 해보고 싶었습니다. 편의점, 전단지, 커피전문점, 주유소 등 많은 아르바이트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1662회)'

가장 적게 선택된 문장은 30회 선택되었다.

‘저는 미국의 MBA 과정을 통해 국내의 일반 경영대학원의 과정에서 부족하기 쉬운 기업의 실제적인 모습 및 실제 사례를 많이 다뤄봄으로써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지식을 쌓았으며, 아울러 국제적인 감각도 키웠습니다. (30회)’

아르바이트를 통해 성실성을, 책임감을, 사회를 배웠다는 말은 얼핏 뻔한 이야기 같다. 편의점에서, 서점에서 일한 경험은 1662회, 2103회 반복되는 흔한 경험이니까. 학자금 빚을 지고, 매달 월세에 생활비 부담을 감당하는 것. 그리고 그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여러 아르바이트를 뛰는 것은 이 사회에서 너무나 ‘뻔한’ 일이다. 그 뻔한 문장 뒤에 숨어있는 몇 년의 고됨도 딱히 미국 MBA 과정이란 경험처럼 ‘특별’하진 않다. 적어도 이 문장들 속에선 그렇다. 참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이렇게.

눈에 띄는 항목 중 하나는 군대인데, '군대경험'은 소항목이 따로 있다. 20대 남성에게 군대 경험은 '자기'를 구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혹은 군대 경험이 ‘나는 조직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기에 알맞은 사례인 것일 수도 있겠다. 자기소개서에서 드러내야하는 ‘나’라는 건 조직이 원하는 면을 갖춘 사람이어야 하니까. 사회경험. 단체생활에 잘 적응한다는 것. 계급 간의 규칙. 이런 키워드를 잘 소화해내는 것이 사회에서 ‘미덕’이라는 걸, 자기소개서를 위해 선택된 문장들은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사실상 제대로 된 첫 사회경험이었던 군대 생활은 저에게서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비록 엄격하고 틀에 짜여 진 계급 간의 규칙이나 힘든 훈련이 있었지만, 그곳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자연스럽게 우정이 쌓이면서 단체 생활에 잘 적응 할 수 있었습니다.(1806회)"

개인적으로, 내가 제일 쓰기 곤혹스러워하는 문항은 ‘성장 과정’ 항목이다. 무엇을 물어보는 건지, 왜 물어보는 건지, 나의 어떤 면을 이야기해야 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너무 지루한 질문 아닌가? 성장과정을 물어보는 게 나를 ‘인재’로 판명하는데 어떤 도움이 되는지도 모르겠고. 물론, 자소서 자동완성기에는 성장과정에 관한 샘플 문장도 있다.

여기서 가장 인기 있는 1순위, 2순위 문장 모두 "부모님께서'라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부모님께서 항상 강조하시던 말이 "책임감" 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맡은 일은 투철한 책임감을 가지고 완벽하게 해내는 것은 부모님의 가르침의 영향이 컸습니다.(19054번)"

"부모님께서 어렸을 때부터 배우는 것을 중요시하셔서인지 지금도 항상 배우는 것에 대한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에 대한 호기심과 배움에 대한 열정은 아마도 부모님의 가르침 덕이 아닌가 합니다.(17415번)"

‘가풍’과 진로의 연관성이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설명되는 자기소개서다. 이 보편적이고 지루한 자기소개서는 다른 나라에서도 통용될까? 군대 경험과 더불어 가족에 대한 설명이 자기소개서 한 항목의 주가 되는 것도 아마 한국식 자소서의 특이한 면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성장과정 항목에서 인용된 문장 중 4위도 흥미로웠다.

"어린 시절부터 이사를 자주 다녀서 전학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환경을 많이 경험해 볼 수 있었고 항상 뛰어난 적응력으로 낯선 환경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8042회)"

불안정한 임대차 환경에서의 ‘잦은 이사’도 ‘뛰어난 적응력’이라는 미덕이 됐다. 한국은 전월세 부담으로 이사가 잦은데, 2014년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세입자 가구는 한 집에서 3.5년을 산다. 그리고 이사를 간다. 독일은 평균 12년은 산다. 이사를 자주 다녀서 전학이 잦았다는 문장이 8042회나 자기소개서의 샘플 문장으로 선택된 건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많이도 만들어내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소서는 일종의 상품 설명서랄까. 구매할 고객(회사)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노력이다. 그 한 두 장짜리 종이 위에서 자기를 매력적으로 ‘구성’하고, 지루한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인사팀 누군가의 마음에 쏙 들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비슷하게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뻔한 사람들이고, 그 뻔한 문장 뒤에 숨어있는 사소한 특별함은 누군가 알아차리기엔 너무 어려운 것일지도. 그리고 그게 ‘특별한가’와 ‘회사 맘에 드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그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이런 재미 없는 문장들을 제공하는 ‘자소서 자동완성기’ 같은 걸 찾게 되는 게 아닌가. 자소서 쓰기, 참 어렵다. 마지막으로 ‘입사 후 포부’ 항목에서 본 샘플 문장을 하나 소개한다. 무려 1만 5천 팔백 9십 4번 선택된 문장. 이 문장은 다른 문장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선택 되었다.

'회사생활이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떠한 난관과 어려움이 봉착하더라도 굳은 각오로 열성을 다해 배우고 익히는 자세로 열심히 일해서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15894번) '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이지만 (번역: 회사가 아무리 나를 초과근무를 시키고 박봉에 굴리더라도),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번역: 제발 취직 좀). 행복하지만은 않을 걸 안다고 미리 고지하고 자신의 충정을 어필하는 이 문장이 좀 씁쓸하기도 하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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