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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대학살의 근거 '뉘른베르크법' 마각

입력
2015.09.1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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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9월 15일 나치의 뉘른베르크법이 공포됐다. 제7차 뉘른베르크 전당대회(9.10~16ㆍ사진) 도중 히틀러는 현지에서 제국의회를 소집, 통칭 뉘른베르크법이라 불리는 두 법안- 독일 혈통 및 명예보존법(the Law for the Protection of German Blood and German Honour)과 제국 시민법(the Reich Citizenship Law)-을 통과시켰다. 전자는 유대인과 독일인의 결혼 및 성관계를 금지하는 법안이고, 후자는 유대인의 독일 시민권을 박탈하는 법안이었다.

나치는 11월 14일 부속법령으로 ‘유대인 분류 기준’을 확정했다. (외)조부모 4명 중 3명 이상이 유대인이면 유대인, 2명이면 1급 혼혈, 1명이면 2급 혼혈. 이들은 제국 시민이 아니므로 투표권을 비롯한 모든 정치권 권리를 박탈 당했고, 당연히 공무원으로 일할 수도 없었다. 1,2급 혼혈은, 희망자에 한해 별도의 인종 재분류 심사를 받을 수 있었지만 실제론 무의미했다. 나치에게 중요한 것은 ‘아리안 순혈’이었다. 유대인은 이제 피를 다루는 의료업에 종사할 수 없게 됐고, 45세 미만 가임기 독일 여성을 가정부로도 고용하지도 못했다. 여권에는 붉은색 J(judeㆍ유대) 도장이 찍혔다.

뉘른베르크법은 11월 26일 흑인과 집시 등으로 적용 범위가 확대됐고, 36년 베를린 올림픽이 끝난 직후부터 조사와 기소 등 본격적으로 작동되기 시작했다. 600만 명의 유대인을 비롯한 타 민족ㆍ인종 학살의 ‘법적 근거’가 바로 뉘른베르크법이었다.

10년 뒤인 45년 10월, 법이 만들어졌던 바로 그 도시에서 열린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괴링 등 13명은 사형, 헤스 등 3명은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46년 12월부터 49년 3월까지 열린 2차재판은 유대인학살 관련자 재판이었다. 관료와 의사 법률가 등 기소된 185명은 적법한 절차로 제정된 법에 따라 적법하게 하달된 명령을 수행했으므로 무죄라고 주장했다.

나치의 인종학살은 아무리 지겹게 되뇌어도 지겨워할 수 없는 인류의 업보다. 다만 더불어, 유대인이자 공산주의자였던 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이런 말도 더불어 기억하자. “나치 대학살에 기대어 유대인은 사상 유례가 없는 박해를 받은 집단이라고 세계 양심에 호소하는 ‘희생자’의식에 나까지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는 겨레의 휘장을 달지도 않고 나라의 깃발을 휘날리지도 않는다. 역사가로서 판단하기에(… 내) 종족이 ‘선택’받았거나 특별한 민족이라는 주장이 조금이라도 정당하다면 그것은 과거나 현재 또는 미래에(…)그 부족이 모여 살았던 게토나 집단거주구역 안에서 이루어진 일 때문이 아니라(…이후) 두 세기 동안 드넓은 세계에서 그들이 인류를 위해 이룩한 괄목한 만한 업적 덕분이라고 생각한다.”-자서전 ‘미완의 시대’(이희재 옮김, 민음사)에서.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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