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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선] 5만원 짜리 美와인이 ‘호갱님’ 만나는 얘기

입력
2015.09.22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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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쓰고 떫었다. 내 친구 조변은 임변이 인생의 쓴 맛을 아직 알지 못 해 그 맛을 모른다고 놀렸다.

어려운 자리에서 한 두 잔 받아 먹다 보니 시간이 지나 내 입맛도 변했다. 느끼한 음식을 먹을 때면 은근슬쩍 와인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맥주처럼 배부르지 않고 소주처럼 쓰지 않았다. 목 넘김이 급하지 않아서 좋았다. 천천히 입 전체에 향을 머금은 채 조금씩 넘기다 보면 음식 맛도 덩달아 좋아졌다. 온 몸이 얻어 맞은 듯 피곤할 때에도 슬그머니 생각이 난다. 와인 한 모금에 피곤을 함께 넘겼다. 조변, 이제 나도 인생의 쓴 맛을 알게 된 것일까?

집에서 혼자 먹을 때에는 마트에서 산 2~3만원대 와인을 여러 번에 걸쳐 나눠 마시지만, 한번 씩 다른 분들 덕에 얻어 먹은 고가의 와인 맛이 생각나곤 한다. 입맛이 둔감하여 그 맛을 정확하게 구별하지는 못하지만 20만원대 이상 특히 50만원 이상의 와인의 맛은 내가 평소 먹던 와인과는 확연히 다른 맛을 냈다(확실히 숙취도 덜 했다).

그러나 혼자 집에서 먹는 주제에, 그것도 맛을 정확히 잘 구별도 못하는 주제에 그런 호사를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런 와인을 집에서 먹는 것은 상상도 못 하고, 아쉬운 대로 ‘가격대비 괜찮아’라며 애써 위안을 하고 한 잔씩 하곤 했다.

몇 달 전에 미국에 다녀왔다. 대형마트 직원에게 와인 추천을 부탁하자, 그 직원이 나파밸리 와인을 소개하며 조금 망설였다. “정말 훌륭한 와인인데, 가격이 좀 비싸서….” 얼마인지 물어보니 49달러였다. 5만원. 숙소에서 홀로 반주로 하기에는 조금 비싼 가격대이지만 훌륭하다고 하니 한 번 사보지 뭐 하는 마음으로 샀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 와인을 개봉했다. 이게 웬일인가. 이게 5만원짜리란 말인가? 이것은 내가 어쩌다 한 번 맛보던 20~30만원 대 고급와인의 맛이 아니던가.

가격대비 이렇게 훌륭한 와인이 있다니 한국에서도 꼭 사먹어야겠다고 마음 먹고, 검색을 해보았다. 한국에서도 판매를 하는지, 그리고 한다면 얼마에 파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파는 와인은 일본에서보다 평균 1만원이 더 비싸단다. 칠레나 유럽 등과의 FTA 효과를 느끼려면 당분간은 더 호갱님으로 살아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우리나라에서 파는 와인은 일본에서보다 평균 1만원이 더 비싸단다. 칠레나 유럽 등과의 FTA 효과를 느끼려면 당분간은 더 호갱님으로 살아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반갑게도 한국에서도 판매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국내 시중 소매가는 27만원이었다. 내 혀가 우리나라 와인의 시중가를 정확하게 감별한 것이다.

그제서야 내가 한국에서 먹은 20~30만원 대의 고가 와인이 현지에서는 그 1/5 가격의 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종종 먹던 2만원짜리 와인의 현지 가격은 대체 얼마란 말인가.

그리하여 공부를 해보니 수입와인의 가격을 결정하는 요소는 세금, 물류비용과 도ㆍ소매 유통 마진이다. 우선 와인의 세금은 관세(수입가격의 15%)와 주세(수입가격과 관세의 합산 가격의 30%), 교육세(주세의 10%), 부가세(전체 합산가격의 10%) 등이다. 물류비용은 전체 가격의 3%정도다. 따라서 와인 가격의 나머지는 수입 과정 및 유통과정의 마진으로 봐야 하는데, 수입, 도매상, 소매상으로 이어질 때마다 각 단계에서 약 30% 마진이 붙는다고 공정거래위원회는 보고 있다.

그제서야 수입와인 가격이 현지가격보다 왜 5배 이상 비싸게 판매되는지 이해가 됐다. 가장 큰 이유는 관세, 주세, 교육세, 부가세 등 붙는 세금자체가 많다는 거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수입을 포함한 유통과정에 있었다. 우리나라는 애초 와인수입을 허가제로 운영하다가 2000년도가 되어서야 비로소 신고제로 전환하였다. 와인 수입을 허가 받은 사람만 할 수 있도록 했으니 마진을 많이 붙일 수밖에 없던 구조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고제로 전환하였다고 하더라도, 무분별한 난립을 이유로 신규면허신고를 종종 제한하기까지 한다.

뿐만 아니라 수입업자가 도매업을 겸하고 소비자에게 직접판매를 할 수 있게 한 것도 2012년도가 되어서다. 그간은 수입업자는 도매상과 소매상을 거쳐야만 소비자에게 판매할 수 있는 다단계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도매상과 소매상의 마진 30퍼센트가 와인가격에 추가되어 있었다. 쉽게 생각하면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이 해외에서 직접 와인을 몇 박스 사서 한국에 들여와 물류비용과 세금만 덧붙인 가격에 식당에서 판매하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구조였던 거다.

이런 폐쇄적인 다단계 구조 때문에 수입상들과 도매상들은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었지만, 소비자들은 같은 와인을 세계 최고가에 구매해야만 했다. 소비자를 볼모로 일부 상인들만 큰 돈을 번 것이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이제 칠레와 유럽과 FTA도 체결해서 관세도 없고, 수입상이 직판도 가능하게 되었으면 이제는 좀 싸져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여전히 같은 와인이 일본보다도 평균 1만원 정도 더 비싸게 팔리는 걸까.

가격 한 번 올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하루라면 내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한 달이다. 수입상들 입장에서는 기존 소매상들의 눈치 때문에 가격경쟁을 쉽게 못하는 측면도 있다. 무엇보다도 제도가 바뀌어도 그것이 실질적 효과를 나타내려면 최소 몇 년이 걸린다. 아직은 소비자들이 호갱님이다.

와인 가격의 인하를 가시적으로 느끼려면 앞으로도 최소 몇 년은 더 필요할 것 같다. 어제는 친한 친구와 고기를 구워 먹었는데, 미국에서 먹던 그 49달러짜리 와인이 간절히 생각났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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