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새로 개업한 레스토랑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많은 인파 속에 낯익은 얼굴이 있어 서로 몇 초간 쳐다보며 상대의 이름을 외쳤다. 친하게 지냈던 고등학교 동창과 약속하지 않은 조우였다. 가까운 데 들어가 잠깐 얘기를 나누기로 하고 맥주 한잔과 참치타다키, 그리고 야키우동을 주문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다른 사람이 만든 참치타다키와 야키우동 또한 색다른 감회에 젖게 했다.
2000년 여름. 반년 전 캘리포니아롤과 오코노미야키, 다코야키를 메뉴에 넣어 대박을 터뜨린 후, 윗선들의 퓨전요리에 대한 관심이 각별해졌다. 조리부장과 대표이사까지 우리 주방에 직접 찾아와 격려의 말씀을 해 줄 정도였다. ‘언제부터 우리 주방에 관심이 있었다고….’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부담감은 무척 컸다. 봄철에 열린 사내 요리대회에서 우리 주방이 단체전 대상을 받아 금일봉과 상품, 인사고과에서의 좋은 점수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조리부장은 21세기의 시대적 요구까지 들먹이면서 이번 가을 메뉴개편에 새로운 퓨전 메뉴를 넣으라고 강조했다.
처음에는 메인 요리보다 비교적 쉬울 것 같았던 샐러드와 밥, 면 요리를 개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곧 재미있는 조합을 생각해냈다. “그래, 나의 첫 개발은 생선회를 이용한 샐러드야!” 가장 먼저 생참치와 양상추를 함께 씹어 먹었다. 물컹한 참치의 식감과 수분이 많은 양상추의 궁합은 최악이었다. 참치의 식감과 신선한 채소의 만남에서 오는 이질감을 잡는 일이 관건이었다.
참치에 튀김반죽을 입혀 높은 온도의 기름에 튀겨봤다. 맛은 좋았지만 영업장에서 미리 튀겨놓기는 어려웠고, 시간이 잠시만 지체되면 참치와 튀김옷이 분리되었다. 다음에는 참치를 김으로 감았는데, 도마에 올려 칼질할 때마다 육즙이 밴 김이 온통 지저분해졌다. 다시 튀기고, 토치(불꽃점화기)로 굽고, 얼리면서 실패를 반복했다.
새롭게 탄생한 참치는 깨와 거칠게 부순 통후추를 비율대로 섞은 다음 참치의 표면에 입혔다. 그리고 센 불에 달군 팬 위에 굴려가며 2~3㎜ 두께만 익혔다. 비주얼도 좋았지만 맛은 훨씬 훌륭했다. 후추의 강한 맛이 참치의 비린 맛을 잡아주고, 깨의 고소함이 참치의 고소한 맛을 살렸다. 센 불에 겉만 살짝 익혀 뭉클거리는 식감을 잡았고 육즙이 빠지는 현상도 막아 줬다. 이를 ‘참치 타다키’라고 이름 지었다. 일본 전통의 타다키와 만드는 과정과 모양은 다르지만 타다키를 해야 하는 목적이 같기 때문이었다.
다음 과제는 채소와 참치 타다키의 이질감을 줄이는 드레싱을 만드는 일이었다. 한 달 정도를 매일 새로운 드레싱을 만들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참치에도 잘 어울리고, 채소에도 잘 어울리는 드레싱을 만드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의기소침해 하던 어느 날 정기 구독하는 잡지를 뒤적거리던 중에 ‘이열치열(以熱治熱)’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 기사는 무더운 여름날 뜨거운 요리를 소개하는 코너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가 앤초비를 거칠게 다진 다음 레드와인 비니거, 파르마산 치즈, 올리브오일을 섞어 드레싱을 만들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비니거와 치즈, 오일을 섞은 드레싱은 기본적으로 채소와는 잘 어울린다. 거기에 다진 앤초비를 섞어 시저드레싱으로 만들었는데 앤초비의 비릿한 맛이 참치와 조화가 잘 됐다. 나만의 첫 메뉴 ‘시저 튜나 샐러드’는 이렇게 만들어 졌다.
당시에 만들었던 메뉴들은 ‘시저 튜나 샐러드’ 그리고 여기에서 타다키만 빼서 만든 ‘참치 타다키와 아보카도 무스’, 일본의 야키소바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야키우동’ 등이 있다. 야키우동은 국내에서 야키소바면을 구하지 못해 우동면을 사용했고, 야키소바의 A1소스가 우동면과 잘 어울리지 않아 데리야키소스를 사용한 게 주효했다. 지금은 동네 선술집, 분식집, 심지어 가공식품으로도 만들어져 마트 냉장코너에서 볼 수 있는 메뉴가 되었지만, 처음 개발할 때 고군분투했던 모습은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유희영 셰프는?
1992년부터 르네상스호텔, 포스코센터 등에서 셰프로 근무했으며, 2008년 서울 가로수길에 퓨전 일식 레스토랑 ‘유노추보’를 개업해 현재까지 오너셰프로 일하고 있다. ‘특급셰프 유희영의 COOKBOOK’, ‘오너셰프 레시피’, ‘유노추보’, ‘맛있다, 밥’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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