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나름대로 진취적인 미덕으로 취급되었던 “노력”이라는 말이, 근래에는 입지가 영 말이 아니다. 오늘날 저성장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의 고충에 대해서, 예전 고성장 사회의 기억만 가지고는 노력을 더 해야 한다고 위로 같은 핀잔을 던지는 이들의 얄미움을 드러내는 역설적 쓰임새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노력을 해도 한계에 부딪힐 때 더 노력을 열심히 해서 “노오력”을, 그래도 안 될 때 “노오오력”을 요구 받는 사회적 쳇바퀴가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이다 보니, 당연한 귀결이다. 성과를 이루도록 도움을 주는 조언이 아니라, 이루지 못하는 결과에 대해서 당사자에게 책임을 씌우는 무책임한 담론 장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같은 용어가 정반대 방식으로도 쓰이고 있다. 지난 달 노사정위원회에서 오랜 진통 끝에 노동제도 변화 방향을 합의했다는 내용이 그렇다. 노동자측에서 양보하는 해고 사유 확대, 임금피크제 등은 추진 기반이 구체적으로 열렸는데, 사용자측에서 양보하는 부분은 “노력”이 넘친다. 인건비 절감만을 이유로 한 비정규직 남용을 억제하는 것은, 노력해보라고 했다. 비정규직 고용 안정이나 처우 개선 관련 입법도 뭐 노력하자고 한다. 경영상 사유로 고용조정을 할 때 감원을 최소화하는 것도 얼추 노력의 대상이다. 결과를 만들어내라고 확고한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 아닌, 힘껏 그 방향으로 가보라는 그저 그런 응원구호에 불과하다. 이뤄내지 않아도 노력은 했다고 변명할 수 있는 당사자의 책임을 면피시켜주는 안전장치로 작용하는 것이다.
노력이라는 개념을 부족한 결과의 책임을 씌우는 쪽으로도 부족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없애는 방식으로도 마음껏 쓸 수 있는 이유는, 함께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남의 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매한 선의든 음흉한 전략이든, 노력에 대한 강조는 당사자들의 의지에 상황을 타개하는 힘이 담겨있다고 띄워주는 모양을 지닌다. 하지만 실제로는 해당 사안 자체가 당사자들의 의지 소관이니 해결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사소하거나 불가항력인 것으로 포장되어 버린다. 개인의 노력이 부족해서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타지 못하는 것이라면, 다른 이들은 정신 무장을 부르짖는 것 이상은 뭐 할 것이 없다. 정당한 노동환경을 만드는 것이 그저 큰 방향의 노력으로 대충 좋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이라면, 진척이 보이지 않을 때 그저 그 자들이 노력을 제대로 안 하고 있다고 혀를 찰 수밖에 없다. 즉, 상황을 대충 방치해버릴 수 있는 편리한 길인 것이다.
물론 다른 길도 있다. 온 사회의 협업 능력을 총동원해서 어떻게든 진전을 보아야 할 부담스럽게 막중한 사회적 과제임을 시민들이 직시하는 것이다. 사회적 개입과 구체적 의무가 필요한 세부적 부분들을 집요하게 논의하며 실제 해결과 연결된 구체적 여론 압력을 만들어내는, 거의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불편한 길이다.
미디어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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