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자격과 시대적 부합성은 인정
그러나 대망론은 정치접촉 전 허상
지금은 여권 조정에 활용되는 수준
스펙으로 치자면 반기문과 견줄만한 인물은 없다. 유엔 사무총장에 올라 언행 하나하나가 뉴스가 되는, 우리가 일찍이 가져보지 못한 세계 지도자급이다. 보수정권(YS)에서 청와대 수석, 진보정권(노무현)에서 각료를 거친 경력도 돋보인다. 이념과 정파적 편향성 시비에서도 자유롭다는 뜻이다.
케케묵은 영호남 대립구도를 벗어난 충청도 출신인 것도 좋은 조건이다. 적극적 지지까지는 몰라도, 괜한 반감을 가질 요소는 그다지 없다. 여론조사마다 그가 지역, 계층, 세대별로 고르게 지지를 받는 이유다. 성향 다른 정권에서 어느 쪽으로부터도 별 흠집을 잡히지 않았으니 기본적으로 화합, 소통 등의 덕목은 갖췄다고 봐야 한다. ‘기름 뱀장어’란 표현은 그래서 꼭 비아냥만도 아니다.
무엇보다 차기 정권은 통일시대를 여는 책임을 지게 되리라는 점에서 시대적 요청과도 맞아 떨어진다. 한반도에 중대한 상황변화가 일어날 경우(19대 대통령 임기 중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의 국제적 안목과 위기관리 경험, 각국 지도자들과의 남다른 인맥과 유대의 깊이 등은 더할 나위 없는 국가적 자산으로 빛을 발할 것이다.
국제ㆍ외교 외의 경험이 전무하다는 우려가 있지만 언제 우리가 다 갖춘 대통령을 뽑은 적이 있던가. MB는 대기업 사장 해본 경험으로, 박근혜는 정치게임 능력과 배경만으로 선거에서 이기고 대권을 거머쥐었다. 정주영, 정몽준, 문국현 등 고배를 든 이들까지 합치면 부지기수다. 한 분야에서라도 이 정도의 커리어와 전문성을 가졌다는 건 높이 살만한 것이다.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관리ㆍ조정 능력이 떨어져 별 존재감이 없다거나, 지나치게 미국의 이해에 경도돼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일본이나 이해당사국 등의 불편한 시각이 태반이거니와, 어차피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서 유엔의 역할 자체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보면 크게 괘념할만한 비판은 아니다. 어쨌거나 살아서 드물게 어린이 위인전 십여 종에 등장하는 인물이니 그의 자질을 시비하는 건 억지에 가깝다. 그러니 핵심은 자격론이 아니라, 대권의 현실적 가능성이다.
대망론이 신기루인 건 맞다. 비(非)현실정치인에 대한 증폭된 기대일 뿐이어서 현실과 접촉하는 순간 허상은 사라지기 십상이다. 성완종과의 인연설(說) 정도로도 꺾일 수 있을 만큼 허약한 게 그 것이다. 반기문 역시 진흙탕 정치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 대망론은 한 순간에 꺼질 것이라는 데 대체적 의견들이 모아진다.
이쯤에서 지난 대선 전 안철수를 쓴 칼럼이 떠올려진다. ‘현실정치에 대한 극도의 혐오 속에서 백마 탄 왕자처럼 기대를 모았지만, 그는 애당초 진흙탕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나아가 ‘진흙을 묻히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대중이 원하던 안철수가 아니게 된다’고 썼다. 이 역설은 반기문에게도 적용된다. 그의 대망론이 아직은 허망한 이유다.
물론 사정이 안철수와 꼭 같지는 않다. 그는 최소한 사무총장 임기가 끝나는 내년 말까지는 안전하고도 명분 있게 진흙탕을 피해갈 수 있다. 그때까지 여야 정치권에서 미래를 맡길만한 신진들이 부상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기대는 백마 탄 초인처럼 한껏 커져있을 것이다. 선거가 1년도 채 안 남은 그때면 지금처럼 여권구도 조정에 애매하게 활용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외에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다들 지적하듯 결국 그의 결심과 의지에 달린 문제다.
다음 대선에서만큼은 참신한 젊은 신진들의 각축을 열망하는 입장에선 씁쓸한 일이다. 그러나 도저히 정치구조상 새 판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때 가서 반기문 정도의 인물을 선택지에 추가하는 건 나쁠 것 없다는 생각도 한다. 어쨌든 기성정치에는 깊이 물들지 않은 인물이고, 시대적 필요성에도 어긋나지 않으므로.
그를 진지하게 판단해야 할 시간은 많이 남았고, 실제 그럴 때가 올지도 알 수 없다. 집권자의 모호한 산법(算法)에 미리 휘둘릴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반기문 대망론은 일단 접어두어도 좋다.
주필 jun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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