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틈없는 일상 속 “나는 어디에 있나”
울긋불긋 푸릇노릇한 빛깔의 과일들을 펼쳐둔 가게 매대에 발길이 머문다. 빨리 데려가 달라고 아우성이라도 치듯 무르익은 자태를 뽐내고 있는 과일들. 그 틈바구니에 그 사이를 먼저 차지하고 있는 놈이 있다. 사지를 뻗고 늘어지게 낮잠을 즐기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 이 녀석이 아니었다면 허름한 가게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구석진 공간을 이토록 오래 쳐다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백만장자의 침상도 부러울 일이 없을 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에 휘둘리고 있는 사람들에겐 자그마한 몸뚱이를 넉넉하게 품어주는 저 작은 틈새도 부러움의 대상이 될 만하다. 언제 저렇게 몸과 마음을 다 부려놓고 여유로운 한때를 즐길 수 있을 건가. 한낮의 고즈넉한 휴식이 상큼 시큼 군침을 돌게 하는 과일의 맛만큼이나 그립다.
‘도시’하면 우리는 무언가로 꽉꽉 채워져 있는 장소를 떠올린다. 빌딩, 자동차, 각종 상점과 간판들이 빈틈없이 들어선 곳, 아스팔트와 철제 구조물들의 숲, 자본에 의해 철저히 잠식되어 있기에 좌표 안에 들어온 구획 하나하나가 다 비용으로 환산되는 공간. 그리고 도시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에게 다 가치를 매기고 시스템 안에 포섭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매 시간 매분마다 쏟아져 들어오는 뉴스들을 읽고 쓰고 편집하는 기자의 일상은 어떠한가. 안타깝지만 언제 백기를 들고 투항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신문 지면을 한 판이고 두 판이고 만들어내고 나면 하루해가 그냥 저물고, 저 지면을 만든 사람이 나인가 아니면 나 아닌 다른 것인가 구별조차 되지 않는 날이 하루 이틀 쌓이면 어느새 이대로 잠식되어 가는 건 아닌지 서글픈 마음이 들곤 한다. 사방에서 빽빽하게 조여 오는 책임, 업무, 일정에 몰려 바쁘게 움직이고 나서 적막한 피로감이 몰려올 때 쯤 스스로 이렇게 묻곤 한다. “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 건가?”
여유롭게 커피 한 잔 마시기 위해 들어가는 카페, 잠깐 자연의 바람이라도 쐬려고 들르는 공원들. 사실 이런 곳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쉼’을 얻기는 어렵다. 값을 치르고 향유하는 기성품 같은 휴식을 위해 우리는 또 다시 일을 해서 그 대가를 마련해야 한다. 이를테면 노자가 말한 ‘무위(無爲)’의 한때를 도시 한 가운데서 맛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그런 ‘없음’ 속에서 때때로 존재의 의미를 수혈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병들거나 위축될 수밖에 없다. 짬짬이 나 자신을 제대로 내려놓을 곳을 찾지 못한다면 나는 이렇게 ‘나’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거대한 시스템에 의해 구획된 이 빈틈없는 ‘있음’들의 질서 속에서 나는 잠시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틈을 어디서, 언제, 어떻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 사고의 전환…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래서 고개를 들어보니 과연, 그 가운데서도 틈이 있었다. 아무리 빽빽한 빌딩 숲이라도 그 사이에 벌어져 있는 빈 공간은 있기 마련이다. 평소엔 제대로 의식하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비좁은 공간 혹은 찰나에도 ‘없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숨통이 좀 트인다고나 할까. “애개, 겨우”하고 실망한다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그 틈으로 햇볕도 들어오고 바람도 드나들고 빗물도 들이친다. 기죽지 않고 온몸 쭉 펴고 잠드는 고양이들도 종종 들어온다.
자, 위압적인 저 ‘있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틈이 보이는가? 이제 본격적으로 시야를 넓혀볼 차례다. 이 좁은 틈이 다른 모든 ‘있음’들 즉 거대한 도시라는 시스템을 가능하게 하는 기원이자 원동력이라고 가정해보는 거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러한 사고의 전환을 가리켜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이라고 부르곤 했다. 단순히 ‘틀’을 통해 보는 것만으로도 현실을 백팔십도 다르게 사유할 수 있다는 거다. 이런 전환이 일어나게 하는 장치가 바로 카메라다. 이전에는 잘 눈에 띄지도 않았던 틈이, 아니 보아도 의식한 적이 없기에 보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였던 버려진 영역이, 카메라에 찍히면 특별한 존재감을 갖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틈은 이제 ‘무’로부터 생성된 새로운 영역이 된다. 사진에 드러나 있는 저 ‘틈’은 어떤 것 사이에 낀 나머지, 공백이 아니라 생물들이 삶을 영위하고 이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여러 자연 현상들이 머물고 드나드는 통로가 되는 허브(hub) 같은 공간임이 분명하다. 이는 마치 혈맥처럼 곳곳에 퍼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도시를 이루고 있는 각 부위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틈이 도시라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잉여이자 버려진 곳이라는 편견은 감히 틀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히려 그 틈을 유지하기 위해서 도시의 각 부위가 제 역할을 맡아 열심히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어디에 방점을 찍고 무엇을 중심에 두느냐, 선택에 달린 문제다.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러고 보니 수백 년 전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도 그의 대표작인 ‘햄릿’ 속에서 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To be or not to be?”
● 무(無)에서 생성된 독립된 또 하나의 공간
거창하게 철학과 문학 서적을 뒤적이지 않아도 삶의 보금자리에서 살아갈 방도를 찾아내는 일에 도가 튼 평범한 이웃들은 이미 틈이라는 무대 전면에서 활약해온지 오래다. 오류동 재래시장 좁은 뒷골목은 언뜻 보기에는 큰 상점 건물들 사이에 생겨난 공백 같지만 나물을 다듬어 파는 할머니들에겐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당당한 생활의 터전이다. 한 사람이 지나다니기에도 그리 넉넉지 않은 공간에서 플라스틱 박스를 의자로 삼아 한쪽 벽면에 몸을 기대고서, 혹시라도 지나가는 손님을 놓칠세라 전면을 응시하면서 칼을 놀리는 할머니들의 솜씨는 달인의 경지를 뺨친다. 없음에서 있음을 보는 관점의 전환을 통해 우리는 때로 건물들 사이의 빈 공간에서 독립된 또 하나의 공간을 발견하는 발상의 전환을 얻기도 한다.
빈 공간을 활용해 만든 저 비좁은 가게에 누가 들어갈까? 그런 걱정은 접어두시라. 이런 소박한 틈새 공간에서 후루룩 먹는 라면 한 냄비, 커피 한 잔이 더 각별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까. 오히려 화려한 인테리어를 갖춘 으리으리한 장소보다, 이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숨어있는 공간에 틀어박혔을 때 은근히 향미를 돋우는 음식이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틈새에 끼여 따스한 국물을 먹으면서 우리를 사정없이 얽어매는 도시로부터 벗어나 몸을 숨기고 있다는 꿈을 꾸는지도 모른다. 틈은 이렇게 우리에게 묘한 정서적 안정감을 부여한다. 어릴 적 숨바꼭질을 하다 다락방이나 침대 밑 같은 숨겨진 공간을 ‘나만의 비밀장소’로 찜해둔 기억이 있을 것이다. 친구들과의 다툼이나 경쟁도 없고 숙제하라는 어른의 다그침도 도달하지 못하는 좁은 틈에 들어가면 마치 다시 아기가 되어 엄마 품에 안기는 느낌이 들곤 한다. 이곳에서 영영 나오지 않으면 엄마, 아빠가 얼마나 슬퍼할까, 헛된 상상을 하면서 괜스레 눈물을 훌쩍거리기도 했다. 코흘리개적 어린 시절 얘기다.
● 틈 같은 기사, 사진, 편집을 꿈꾸며...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평소에 써먹을 데가 없어 숨기고 살았던 ‘끼’를 좀 부리고 싶었던 게다. 건물 틈으로 바라본 하늘의 모양을 갖고 한글 자모처럼 얼기설기 엮어서 단어 하나를 만들었다. “하늘”. 웬 뜬금없는 아이디어인가 싶었는데 막상 찍어서 한 폭의 틀 안에 담아보니 이미지도 예쁘고 찍은 사람의 의도도 잘 살아나는 것 같아서 편집 작업을 하는 내내 흥이 났다. 파란 색깔과 검은 실루엣 사이의 경계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파트, 빌딩, 나무, 전봇대 등등 다양한 도시의 풍경들이 보인다. 침울한 도시의 어둠 사이를 확 뚫고 나와 파랗게 빛나는 가을 하늘빛이 다시 봐도 후련하기만 하다. 자연이 선사한 풍경이 인간의 인공물과 만나서 우리의 망막에 하나씩 글자를 새겨 넣는다. 아스팔트 숲에 다 가려지지 않고 남아있는 저 틈새들이야말로 진짜 우리의 삶, 마음, 시선이 깃들어야 할 장소이며 언제나 이곳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저 푸르른 틈새가 보여주는 ‘열림’이 없다면 삶의 불꽃도 꺼지고 우리는 ‘매트릭스’라는 거대 시스템 안에 갇힌 채 죽을 때까지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 살아가는 좀비의 신세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하루 한 번이라도 자기를 보라고 하늘은 저렇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일 게다. 그런 마음으로 도시의 풍경을 다시 한 번 카메라로 찍어보면, 어느 것 하나 상형문자 아닌 게 없다.
바쁘다는 변명으로 나를 사방에서 옥죄어 들어오는 일상에 이대로 투항해버린다면 자기가 찜해둔 공간에서 늘어지게 한잠자고 일어난 고양이 팔자보다 나을 것이 없다. 가끔은 바깥에서 주어진 일과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부수고 나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한 삶의 ‘주체’가 된다는 것, 그건 어쩌면 몸담고 있는 세계에서 스스로 틈이 되는 것이 아닐까? 모두가 ‘더하기’를 요구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갈 때 나 혼자 ‘빼기’를 선택하고 반복되는 일상 너머로 걸어 나가는 거다. 틈을 보고, 틈을 만들고, 나아가 직접 틈이 된다는 것은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선택을 할 엄두가 나지 않을 따름이다. 매일 발행되는 신문을 만드는 기자들이 바쁜 일상 속에서 어떻게 그 바깥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발명(발견)하지 않으면 매일 반복되는 시스템이 돌아가는 데 기여하는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가끔 나를 초조하게 만든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 카메라와 같은 장치를 품고서 매일의 일상을 “찰칵”, 찍어둬야겠다고 결심한다. 그 안에 들어가 있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카메라로 찍고 나서, 현상된 사진을 바라보면 비로소 드러나는 틈새처럼, 한걸음 물러나 보면 고분고분하게 시키는 대로 살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던 고민의 흔적들이 드러나 있지 않을까? 내게는 직접 편집한 신문의 면면이 바로 그런 카메라의 사각 틀과도 닮았다.
“자, 봐 주십시오. 여기에 텅 빈 자리가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만일 눈에 띈다면 답답한 일상 속에서 숨통을 트려 했던, 그리고 틔려 했던 노력의 자취입니다. 매번 실패로 돌아가는 시도를 반복하는 것 같아 불안하지만 그래도 흔적만은 남아서 사진을 찍어 올리며 편집한 사람들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비좁은 편폭(篇幅)에서나마 잠시 몸을 숨기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수많은 뉴스의 홍수 속에서도 꿋꿋이 남아 버티는 틈 같은 기사, 어디 없을까요.”
이직 기자 jk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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