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이덕일 천고사설] 국사 서술

입력
2015.10.15 20:00
0 0

동양에서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앞 왕조의 역사를 편찬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를 정사(正史)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도 이런 전통에 따라 고려 인종 23년(1145) 김부식이 왕명으로 ‘삼국사(三國史)’, 즉 ‘삼국사기’를 편찬했고, 조선도 김종서가 세종의 명으로 ‘고려사’를 편찬했다.

물론 각 왕조는 전 왕조의 역사만 쓴 것이 아니라 자국사도 썼다. 그런데 자국사를 썼던 시기를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다. 국세가 한창 뻗어나가던 전성기라는 점이다. 백제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썼다. 근초고왕은 재위 26년(371) 3만 군사로 고구려를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신라는 진흥왕 6년(545) 대아찬 거칠부(居柒夫) 등이 ‘국사(國史)’를 편찬했다. 진흥왕은 함경도까지 강역을 넓혔는데, 진흥왕 순수비(巡狩碑)에는 황제의 자칭인 짐(朕)이라 쓰고 태창(泰昌)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썼다. 고구려는 영양왕 11년(600)에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이 ‘신집(新集)’을 편찬했다. 중원을 통일해 한창 기세가 올랐던 수(隋)나라 30만 대군을 몰살시킨 2년 후이다. ‘서기’ ‘국사’ ‘신집’은 모두 전하지 않지만 국세가 떨칠 때 썼다는 점에서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신집’에 대해서 “고사(古史)를 요약해서 ‘신집’ 5권을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고사’를 사료로 삼았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국초(國初)에 문자를 쓰기 시작할 때 어떤 사람이 사실을 기록해서 ‘유기(留記)’ 100권을 만들었는데 이를 다듬고 정리한 것이 ‘신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사가 곧 유기인데, ‘유기’도 전해지지 않아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개국 초에 기록할 내용이 뭐가 그리 많아서 100권을 썼는지 의문이 생긴다.

이 의문을 풀 때 주목되는 구절이 ‘삼국유사’ ‘왕력(王歷)’조의 고구려 시조 동명왕에 대한 기록이다. “성은 고씨로서 이름은 주몽이다. 추모라고도 하는데, 단군의 아들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인들이 단군과 주몽의 생몰 연대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몰라서 이렇게 적었을 리는 없다. 고구려는 단군 조선을 계승한 나라라고 생각했기에 “단군의 아들”이라고 적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용어가 ‘다물(多勿)’이다. 역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다물’이란 말을 안다. 고구려말로 옛 땅(舊土)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다물이란 용어는 건국 이듬해인 서기전 36년에 나온다. ‘삼국사기’ ‘시조 동명성왕’ 2년(서기전 36)조에 비류국왕 “송양(松讓)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임금으로 봉했다”는 기록이다. ‘지금 땅’을 넓히는 것을 다물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고 했다. 건국 1년 차 고구려에게 회복할 옛 땅이 어디 있었을까? 이때의 옛 땅이란 단군 조선의 강역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래야 시조 추모왕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본 것과 일치하게 된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모본왕이 재위 2년(서기 49)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ㆍ어양(漁陽)ㆍ상곡(上谷)ㆍ태원(大原)을 공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평ㆍ어양은 지금의 북경시 일원이고, 상곡은 하북성 일대이며, 태원은 북경 서쪽 500여㎞ 지점의 산서성 태원시다. 일제 식민사학은 모본왕 때 고구려가 북경과 산서성까지 왔을 리가 없다며 이 기사를 부인했지만 이는 중국의 ‘후한서(後漢書)’에도 기록된 역사적 사실이다. ‘삼국사기’는 또한 고구려 태조왕이 재위 3년(55) “요서(遼西)에 열 개 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략에 대비했다”고 나온다. 이때의 요서 지역이란 모본왕이 공격한 지역 일부를 뜻하는데 모본왕이 되찾은 단군 조선의 강역을 지키기 위해서 성을 쌓았다는 뜻이다.

그간 국정이고 검인정이고 모든 한국사 교과서는 이런 사실들을 부인해왔다. 공격한 고구려의 기록에도 나오고 공격 당한 후한(後漢)의 기록에도 나오지만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따라 “믿지 않겠다”는 어거지가 계속되어 왔다. 그래서 한국사 교과서의 고대사 관련 서술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국사교과서 국정 문제가 정국의 현안이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모두 침묵하고 있다. 심지어 정부기관에서 고대 북한 강역 전체를 중국사로 넘겨주는 사태가 발생해 이를 바로잡아달라고 요청했을 때도 정부는 모르는 체 했다. 현재의 국사 교과서 논란이 일제 식민사학에 의해 왜곡된 고대사 부분을 고치겠다는 뜻이라면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대다수 국민이 쌍수 들어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사라지고 극심한 국론 분열이 불 보듯 환한 현대사만 부각되고 있다.

역사는 교훈을 얻는 거울이다. 자신의 얼굴에 얼룩이 묻지 않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역사를 체제 유지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국정 체제의 북한과 닮아가고 있지 않은지 비춰봐야 한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