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내가 눈썹을 짙게 그리고 눈 주위를 더 밝게 하고 입술을 더 빨갛게 하여 허영이 드러나지 않는 거울을 이쪽저쪽으로 바라보며 잘 어울리는가를 살펴보고 있다면.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의 내 얼굴을 찾고 있는 거여요.” 영국시인 예이츠가 쓴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이란 시다. 예이츠는 여성이 이 세상이 만들어 지기 전, 신이 창조한 최초의 모습, 원형으로 돌아가기 위해 화장을 하는 것이라며 여성의 메이크업을 옹호했다. 즉 화장은 현재 자신의 모습이 아닌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순수한 열망이라는 것.
며칠 전 CNN에 “왜 한국 남자는 화장품에 펑펑 돈을 쓰나”라는 제목의 보도가 있었다. 한국 남성의 피부미용제품 소비량이 세계 1위이고, 2위인 덴마크에 비해 4배이며, 군인들은 저자극 위장크림과 훈련 후 피부미백제품을 산다고 보도했다. 화장하는 남자의 역사는 언제부터일까? 로마 시대의 역사가 오비디우스가 쓴 ‘아름다움의 기교’엔 여드름 제거용 팩 제조법이 기술되어 있다. 역사가 플리니우스는 얼굴을 희게 하고 그 상태를 유지해주는 미백 팩을 만드는 방법을 전했다. 그에 따르면 팩은 콩가루와 맷돌에 탄 보리, 달걀, 포도주의 앙금, 사슴뿔 가루, 수선화 구근, 벌꿀을 섞어 만든다. 이 화장술은 여성뿐 아니라 당시 로마 원로원의 관료들과 정치가들, 즉 남성에게도 적용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로마황제 네로도 밤낮없이 이 팩을 붙였다고.
본격적으로 클렌징 팩이 등장한 것은 17세기다. 우유의 주성분인 카세인을 사용, 미백과 클렌징을 동시에 얻었다. 이 팩을 유행시킨 것은 앙리 2세다. 화장은 기초화장과 색조화장으로 나뉜다. 색조화장이 얼굴에 다양한 색을 주어 특정 부위를 작거나 크게 보이게 해주고 개성적인 표현을 도와준다면 기초화장은 영양공급을 위한 플러스적 화장과 노폐물을 비롯해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는 마이너스적 화장으로 나뉜다. 최근 기초화장품의 화두는 후자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피부의 노폐물제거, 각질제거, 온통 ‘제거 시리즈’다. 남성용 화장품은 단연 후자다.
그런데 인터넷에는 색조와 기초화장도 구분 못하는 이들의 악플이 달린다. 1920년대 ‘신여성’이란 잡지에는 당시 모던걸이라 불리던 여성들의 모습이 잘 소개되어 있다. 이때 해외 유학을 하거나 고등학교를 마친 여성을 신여성으로 분류하는데 그녀들의 욕망은 지금과 다르지 않다. 한 기사에는 “예술지상주의자이며 열정적인 사랑을 꿈꾸는 나는 꽃미남을 원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남자를 찾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독일의 괴테가 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선 “남자들은 자연이 낳아준 그대로의 자신만으로도 여자의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노라고 우쭐해 한다”며 자신의 외모를 가꾸지 않는 것이 남성적이라고 자부하는 남자들의 허영심을 꼬집는다.
문제는 남자의 화장을 둘러싼 사회적 담론의 수준이다. 학자들의 해석은 ‘외모만이 마지막 경쟁무기’라는 지점에 머물러있다. 이러한 해석만이 다일까? 현대의 뇌과학은 화장에 대한 다른 해석을 시도한다. 남자 여자 모두 화장을 하는 건 뇌가 화장의 힘에 끌리기 때문이란다. 화장을 한 타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인간은 그것을 ‘그렇게 되고 싶은 자신’으로 인식하고 기대에 근거한 학습(화장)활동에 빠진단다. 즉 타인의 존재를 전제로 평소의 자신과 다른 사회적 자기를 구축하려는 행위라는 것. 인간은 화장을 통해 얼굴의 좌우 차이를 줄여 대칭적으로 보이게끔 노력한다. 인간은 좌우대칭에서 미의 본질인 ‘우아함’의 수준을 찾아낸다. 따라서 화장을 통해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얼굴인 거울상과 타인이 보는 자신의 얼굴 사이의 거리를 약간이나마 좁힐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화장한 얼굴을 보고 타인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처럼 반응한다.
결국 화장이라는 행위는 단순히 표면적인 치장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자신의 상, 특히 타인과의 관계 속에 있는 사회적 자아를 형성한다. 화장을 통해 인간관계가 개선되고 의사소통 능력까지 높아진다니 놀랍다. 더 재미난 건,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할 때, 뇌파가 활성화된다는 점이다. 화장은 곧 얼굴 표피만을 가꾸는 일이 아닌 뇌를 즐겁게 하고 내면을 비옥하게 살찌우는 일이니, 남자들의 기초화장을 허하라. 더 이상 시비 걸지 말길.
김홍기ㆍ패션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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