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세계행복보고서를 비롯한 수많은 조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꼽히는 덴마크. 많은 사람들이 ‘궁극의 복지’로 불리는 막강한 사회보장제도를 그 원인으로 꼽는다. 이 복지의 천국은 그래서 ‘헬조선’의 현실에 지친 한국 젊은이들이 ‘탈조선’의 대안으로 가장 많이 꼽는 나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덴마크 사람들이 행복한 것은 개개인의 내면에 행복의 씨앗이 자라나기 좋은 토대가 있기 때문”이며, “그 토대가 있었기에 강력한 사회보장 시스템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는 덴마크인이 있다. 다양한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덴마크 사람들의 행복비결을 분석한 책 ‘덴마크 사람들처럼'(로그인 발행)을 펴낸 말레네 뤼달(40)이다.
프랑스에 대한 동경으로 18세에 덴마크를 떠나 파리에서 학업과 직장생활을 이어온 말레네 뤼달은 “행복하지 않은 나라 프랑스에서 지내면서 역설적으로 덴마크가 얼마나 행복한 나라인지 알게 됐다”고 한다. 뱅앤올룹슨과 를레앤샤토를 거쳐 하얏트그룹 커뮤니케이션 이사를 역임한 그는 지난해 프랑스에서 출간된 ‘덴마크 사람들처럼’이 언론의 대대적인 호평을 받으며 전 세계에 덴마크식 행복의 영감을 전파하는 ‘행복전도사’로 변신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친필편지까지 받았을 정도로 책은 프랑스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서울국제도서전 방문차 한국에 온 그를 만나 북유럽식 사랑과 연애, 결혼과 육아에 대해 들었다.
덴마크식 행복의 기초는 신뢰
뤼달이 추출한 덴마크식 행복의 첫 번째 요인은 신뢰다. 그가 말하는 덴마크식 신뢰를 보여주는 일화들(괄호는 다른 나라에서의 반응): ▦새벽시간에도 빨간 불에는 아무도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는다. (답답하게 왜 그래?) ▦대부분의 가판대가 요금함만 설치한 무인시스템이다. (언제 요금함이 다 찰까?) ▦보험회사는 예금인출 영수증 없이도 여행 중 도둑맞은 돈을 보상해준다. (지금 농담하시나요?) ▦육아휴직 중인 젊은 엄마들이 아기가 탄 유모차를 카페나 레스토랑의 문밖에 세워두고 먹고 마신다. (아동방임에 유기죄!) 하지만 신뢰의 레이더가 전방위로 작동하는 덴마크 사회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게 뤼달의 설명이다. “어떤 국가도 신뢰사회를 출범시킬 수는 없어요. 개개인이 시작해 거대한 신뢰의 원을 먼저 형성해야 해요.” 복지제도를 악용하는 ‘게으른 로베르토’가 덴마크라고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 예외적 개인에 온 사회가 격분하고, 역사에 기록해 두고두고 환기한다. 불의의 비용이 큰 사회다.
한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노 키즈 존’ 같은 것도 덴마크에 있을까? 아이들이 공공장소에서의 예절을 익혀야 하는 건 맞지만, 원천봉쇄는 일종의 아동혐오 아니냐는 게 이 논란의 핵심이다. “그런 건 없어요. 덴마크 아이들이 특별히 더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애들이 다 뛰어다니고 시끄럽죠. 다만 우리는 격식을 차리지 않는 편안한 문화를 갖고 있어서 누구든 ‘얘야, 조용히 좀 해라’ 얘기한답니다.” 그래도 그 아이 엄마와 싸움이 나지 않는지 묻자 “문제 없다”는 명쾌한 답변. “덴마크 기차에는 ‘침묵구역’이라는 게 있어요. 아이가 들어와서 조용히 하면 문제 없습니다. 떠드는 아이에게는 ‘휙’ 휘파람을 불어 주의를 주는 정도인데, 그 정도로도 아이들은 이 구역에 들어오지 않아요. ‘아이는 절대 들어오면 안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지는 않죠.”
덴마크식 vs 프랑스식 vs 미국식 육아
‘이곳은 너와 내가 함께 사는 곳’이라는 확고한 인식은 인성에 초점을 맞추는 덴마크 고유의 육아법을 만들어냈다. 한국에서 정전처럼 받아들여졌던 미국식 육아가 “너는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라는 말로 자존감을 고취하는 데 중점을 뒀다면, 이에 대한 반동으로 최근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보다 훈육적이고 엄격한 프랑스식 육아다. 떼쓰는 아이는 복도 끝으로 끌고가 찰싹 따귀를 때리고,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간식도 주지 않는 프랑스식 육아는 아이가 두세 살만 돼도 고급 식당의 정찬을 얌전히 받아먹는 놀라운 광경을 연출하며 한국 엄마들을 홀렸다.
“덴마크식 육아, 더 넓게 스칸디나비아식 육아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게 하고, 자기 자신에게 자유롭도록 도와주는 육아법이죠. 미국식이 아이의 꿈과 재능을 고양시켜주는 반면 자기중심적이 될 수 있는 단점이 있다면, 프랑스식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지를 일찍부터 가르쳐서 성인이 돼 세상에 나갔을 때 잘 항해해 나갈 수 있게 도와줍니다. 정중하고, 에티켓에 밝고, 역사와 철학 등 교양이 풍부하지만 온통 당위가 지배하는 세계라 창의적인 아이들에게는 좀 힘든 육아법이에요.”
18세 아들을 둔 그의 친구는 최근 덴마크식 육아의 정수를 보여줬다. “말레네, 나 너무 행복해. 우리 아들이 앞으로 뭘 공부해서 무슨 일을 할지 드디어 찾았대.” “와, 대단하다. 뭔데?” “응, 물류기술.” “멋진데? 그래서 뭐가 되겠대?” “응, 청소부.” 한국인 엄마 기자와 덴마크인 작가 사이에 짧은 정적. 뤼달은 “이 경우에도 부모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찾았다는 이유만으로 그토록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다는 게 덴마크식 육아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덴마크에는 사회의 모든 역할이 중요하다는 합의가 있어요. 쓰레기 수거가 안 되는 사회를 생각해보세요.”
덴마크가 임금이나 사회적 지위의 격차가 적은 사회이기 때문 아니냐는 반론을 제기하자, “우리 사회가 좀 더 쉬운 건 사실이지만, 이건 개인의 선택이자 관점의 문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사회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역할이 필요해요. 의사와 변호사만 있는 사회를 생각해보세요. 덴마크에도 변호사나 의사가 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임금체계의 최상위 5%에 해당하지만, 사회적으로 더 나은 사람인 건 아니에요. 덴마크 교육의 목적은 사회에는 반드시 너의 자리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아이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거니까요.”
뤼달은 덴마크 교육제도가 5%에 해당하는 엘리트를 양성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는 걸 인정한다. “잘난 아이들은 이미 잘하고 있기 때문에 부족한 아이들에게 신경을 쓰는 거죠. 우리는 95%의 보통 학생들과 5%의 영재 학생을 똑같이 취급합니다.” 덴마크인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얀테의 법칙(보통사람의 법칙)은 ‘네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남보다 더 똑똑하다고 착각하지 마라’ 등 겸손의 10계명으로 이뤄져 있다. “‘네가 남보다 뛰어나다’고 가르치면 아이는 자신의 행복과 자존감을 위해 다른 사람을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어요. 그런 아이는 새 자전거 생기면 ‘내 자전거 새 거다. 너는 없지?’ 이렇게 말을 하게 되죠. 겸손을 배운 덴마크의 아이들은 ‘나 새 자전거 생겼다. 너 한번 타볼래?’라고 말하는 게 보통입니다.”
남녀간 철두철미 ‘반반이즘’
덴마크의 연인들은 데이트 비용도, 동거ㆍ결혼 비용도, 생활비도 철저하게 반반씩 부담한다. 뤼달은 덴마크 왕세자가 포함된 다섯 명의 일행과 파리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왕세자도 정확히 자기 먹은 몫만 밥값을 냈다. 데이트 후 집까지 데려다 주면서 휘발유값을 달라고 한 남자친구도 있었다고. 어림짐작해 냈더니 ‘사실 좀 부족해. 선물한 걸로 칠게’ 하더란다. 여성의 매력자본과 남성의 화폐자본이 종종 등가의 교환관계를 이루는 한국식 데이트 문화에서는 재회가 불가능한 만남처럼 보이건만, 덴마크에서는 너무 당연한 일이라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남성과 똑같이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배우며 자랐어요. 결혼이란 남편의 소득에 의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머물기를 원하기 때문에 하는 거죠. 비용을 반반 나누는 것은 평등한 관계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대신 가사와 육아 노동에서도 철두철미 ‘반반이즘’이 관철된다. 뤼달이 늘 ‘남성해방’부터 얘기하는 이유다. “여성해방은 많은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과 비슷해지는 것을 의미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남성이 좀 더 여성과 비슷해져야 해요. 여성이 일을 시작하면 남성이 일의 속도를 늦춰 가정에서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스템이 무너져요. 양성평등이 모든 사람이 남성처럼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덴마크 여성의 일일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1시간 미만으로 남성과 비슷하다. 반면 한국은 여성이 3시간 28분, 남성이 47분으로 4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물론 남자들이 여자를 위해 문을 잡아주지도, 무거운 짐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프랑스에서 지내다 신사도와 기사도가 없는 고국에 돌아오면 깜짝깜짝 놀랄 때도 많다고. “좀 로맨틱하지 않은 건 사실이죠. 하지만 덴마크 여자들이 원한 바였어요. ‘내가 어때서 가방을 들어준다는 거야?’ 따졌으니까요.”
돈에 초연하고, 휘게에 집중한다
뤼달은 덴마크인들이 행복한 이유 중 하나로 사치에 부정적이고 돈에 초연한 태도를 꼽았다. 하지만 덴마크는 뱅앤올룹슨, 로얄 코펜하겐, 베르너 팬톤, 아르네 야콥센 등 하이엔드 브랜드를 여럿 보유하고 있다. “덴마크인들은 이것을 사치품이라기보다 품질 좋은 내구재로 인식해요. 우리는 집 꾸미는 데 투자를 많이 하니까요. 그걸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뤼달은 메고 온 샤넬백을 보여주며 “9년 전 승진 보너스로 산 유일한 샤넬인데, 9년간 매일 들고 다녀 모서리를 기웠을 정도”라고 말했다. “중요한 건 끊임없이 더 좋은 걸 찾는 중독상태가 되지 않는 거죠. 편안하고 아름답지만 지나치게 화려하지는 않은 것. 그게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원칙이기도 하고요.”
좋은 사람들과 보내는 즐거운 시간을 뜻하는 ‘휘게’는 번역이 불가한 덴마크 고유의 문화다. 가족이 둘러앉아 양초를 켜놓고 핫티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엄마가 ‘휘게타임’을 외치면 아이들이 기쁜 표정으로 쏜살같이 모여드는, 덴마크적 행복의 ‘앙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느 나라에나 티타임은 있다. 하지만 휘게는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환대하며,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것이 아니라 소박하고 여유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우리가 돈에 초연할 수 있는 건 휘게라는 즐거운 시간이 두툼한 월급 봉투보다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인 것 같아요. 기본적인 공공서비스를 보장하는 복지가 잘 자리잡고 있고, 이런 기본 바탕이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그는 책의 첫 장 제목을 ‘나는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라고 붙였다. 그리고 어느 덴마크 젊은 여성의 말을 인용했다. “덴마크에서 좋은 점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향해 걸어가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만약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국가가 있으니까요.”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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