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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극단과 끈질긴 교류… '자살 = 죄악' 터부 맞서다

입력
2015.10.1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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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연구 본격 시작

자살률 급증하던 2차대전 직후

자살의 시대별 인식 등 연구로 1950년 UCLA서 박사학위

자살학 분야 최초 논문 보고

LA VA병원서 만난 슈나이드먼과 메모·유서 등 자살사례 본격 연구

"자살 충동자는 만들어지는 것"

자살 예방에 일생을 걸다

1958년 LA예방센터 설립

상담·생존자 치유에 몰두하며 자살의 오점 지우기 위해 헌신

자살학(Suicidology)의 공동 창시자 노먼 파베루는 지난 해 미국 자살학회 비디오 연설에서 “전화 한 통 같은 아주 사소한 관심으로도 자살을 막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겐 언제나 굉장한 일처럼 여겨졌다”고 말했다. 그는 한 생을 바쳐 자신의 저 말이 ‘소박한 상식’처럼 들리게 하는 ‘굉장한’ 일을 해냈다. 유튜브 화면 캡처
자살학(Suicidology)의 공동 창시자 노먼 파베루는 지난 해 미국 자살학회 비디오 연설에서 “전화 한 통 같은 아주 사소한 관심으로도 자살을 막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겐 언제나 굉장한 일처럼 여겨졌다”고 말했다. 그는 한 생을 바쳐 자신의 저 말이 ‘소박한 상식’처럼 들리게 하는 ‘굉장한’ 일을 해냈다. 유튜브 화면 캡처

아우슈비츠 생존작가 장 아메리(Jean Amery, 1912~ 1978)는 ‘자유죽음’(김희상 옮김, 산책자) 서문에 “이 책은 심리학이나 사회학과는 거리가 멀다. ‘자살학’이라는 과학이 끝나는 곳에서 이 책은 시작한다”고 썼다. 책에서 그는 생명의 논리, 삶의 논리로 죽음과 자살을 설명하고 배격하는 모든 시도들을 반박하고 조롱하며,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깨어 있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택한” 자유죽음을 옹호했다. 그에게 자유죽음은 ‘에세크(echecㆍ체스 게임의 외통수라는 의미)’즉 돌이킬 수 없는 총체적 삶의 실패에 직면한 이가 “모든 삶의 충동, 살아있는 존재의 끈질긴 자기보존 충동”에 저항하며 에세크를 돌파하는 유일한 길이자, “자유를 가장 급진적으로, 어떤 점에서는 가장 생생하게”실천하는 행위였다.

아메리보다 6년 늦게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시에서 태어난 심리학자 노먼 파베루(Norman Farberou)는 2차대전을 아우슈비츠 수감자가 아닌 미 공군 대위로 겪었다. 그는 전후 전우들이 겪는 사회 부적응의 고통과 급증하는 자살률에 학자로서 감응, 아메리가 “경의와 더불어 약간의 경멸도 숨기지 않”았던 자살학(Suicidology)의 토대를 닦았다. 미국 최초의 자살예방센터를 세웠고, 생명의전화 서비스를 처음 시작했고, 자살에 대한 심리과학적 이해와 예방 연구, 자살로 친지를 잃은 생존자 심리 치유로 생을 보냈다. 국제자살예방협회(IASP)의 공동 설립자인 그가 IASP가 제정한 세계자살예방의 날이던 9월 10일 별세했다. 향년 97세.

70년대 LA경찰 자살 강연 장면.(DHMHS 자료사진)
70년대 LA경찰 자살 강연 장면.(DHMHS 자료사진)

상반된 생각을 한 듯 보이지만, 아메리와 파베루는 자살에 대한 세상의 통념에 맞서 싸운 동지였다. 아메리가 ‘생명의 논리’로부터 자살의 인식론적ㆍ철학적 해방을 추구함으로써 자살자의 명예를 지키려 했다면, 파베루는 자살 행위에 드리운 종교적ㆍ사회 문화적 보편 인식들, 예컨대 자살자의 비겁함과 나약함, 남은 자의 수치와 죄의식을 걷어내고 그 이면의 고통을 치유하려 했다.

파베루가 자살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40년대 말 2차 대전 직후였다. 그는 자살에 대한 시대별 인식과 태도에 관한 연구로 1950년 UCLA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는 전후 베테랑들이 알코올ㆍ약물 중독과 부상ㆍ장애 등 전쟁 후유증으로, 또 사회 재적응 어려움 등으로 자살률이 급증하던 때였다. 반면에 사회는 그 현상을 냉정히 들여다보기보다 터부처럼 외면하거나 감추려 했고, 심지어 죄악시했다.

그의 첫 직장은 LA 재향군인관리국(VAㆍVeterans Administration) 신경정신과 병원이었다. 거기서 평생 동지가 되는 동갑 친구 에드윈 슈나이드먼(Edwin S.Schneidman, 1918~2009)을 만난다. USC를 나온 슈나이드먼의 첫 직장도 LA 브렌우드의 VA병원이었다. 49년 슈나이드먼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두 참전군인의 젊은 과부에게 병원을 대표해 편지를 쓰는 일을 맡게 됐고, 그 일을 계기로 자살 사례연구를 시작했다.(LAT, 2009.5.18) 둘은 병원에서 맡은 일을 하면서 미 국립정신보건원(NIMH) 등에서 각자 수집한 자살 사례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한다.

자살자 메모와 유서 등이 보관된 LA카운티 검시관실은 그들에게는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44~53년 사이 유서 721건을 분석했고, 자살 충동을 겪지 않는 백인 피실험자들에게 가상 유서를 쓰게 한 뒤 진짜 유서와 비교 분석했다. 실제 유서에는 사후 가족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비롯해 구체적이고 시시콜콜한 일상사들이 주로 담긴 반면 피실험자들의 글에는 극적인 어조(dramatic language)의 표현들이 많다는 사실 등을 확인했다. 그들은 자살학 분야의 최초 논문이라 할 수 있는 5쪽짜리 공동 보고서 ‘자살의 증거들’을 56년 공공보건보고서에 실었다. 보고서에서 그들은 “(진짜 유서 중에도) 곧 자신이 살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수용한 상태에서 쓰여진 것도 있지만, 미래의 일들에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며 자신이 계획한 행동에 대한 망설임과 모순을 드러내는 것도 있다”고 밝혔다.(NYT, 15.9.15) 둘은 NIMH와 VA를 설득해 이후 3년간 총 150만 달러에 달하는 7년간의 연구비를 받아 낸다.(‘에드윈 슈나이드먼 박사의 심리부검 인터뷰’조용범 옮김, 학지사) 현대 자살(예방)학이 그렇게 탄생했다.

당시로선 그들조차 ‘자살(Suicide)’이란 ‘금기어’를 쓰기 어려웠는지 연구소의 첫 이름은‘돌발 죽음(Unpredicted Death) 중앙연구소’였다. 정신과 의사 로버트 리트먼(Robert E. Litman, 1921~2010)을 합류시켜 독립기관인 LA자살예방센터(LASPC)를 설립한 것은 1958년이었고, 비슷한 사회문제로 골머리를 썩이던 유럽 학계(오스트리아 신경심리학자 어윈 링겔(Erwin Ringel, 1921~1994)이었다) 와 공동으로 국제자살예방협회(IASP)를 창립한 것은 1960년이었다.

파베루와 슈나이드먼은 모든 자살자를 ‘정신병자(psychotic)’로 뭉뚱그리던 통념에 맞서 고전적 정신 질환이 자살의 원인인 경우는 15%에 불과하고 주된 원인은 ‘우울증(depressionㆍ근년에는 우울증도 정신병으로 분류된다)’이며 그 중 약 10%는 성공하려는 의도 없이 자살을 시도한다는 사례연구 결과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파베루는 “자살 충동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파괴적 행동의 근원을 더 잘 이해함으로써 그 충동을 분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살 연구는 크게 종적 연구와 횡적 연구로 나뉜다. 종적 연구가 아동기의 트라우마에서부터 시작해 객관적 요인들을 장기적으로 테이터화하는 접근법이라면 횡적 연구는 현재와 가까운 과거의 자살자의 말과 글과 행위 등을 통해 지금(혹은 근래) 무슨 일이 일어났고, 자살자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는지 분석하는, 보다 임상적이고 ‘개별 기술적’인 방법이다. ‘심리부검(Psychological autopsy)’이란 용어를 처음 쓰고, 원칙과 방법의 기초를 닦은 것도 슈나이드먼과 파베루였다. 슈나이드먼은 “자살자는 자신의 심리적 유해(psychological skeleton)를 생존자의 감정의 벽장(emotional closet) 속에 남겨둔다”고 했다. 한국 중앙심리부검센터에 따르면 심리부검은 “(유가족 인터뷰 등을 통해) 사망 전 일정기간 동안의 심리적 행동양상 및 변화, 상태를 재구성하여 높은 가능성을 지닌 자살의 원인을 추정하는”과정 전체다. 오늘날의 심리부검은 사망 전 상황뿐 아니라 “의학 병력, 성격 특성과 행동적 특성, 자살 전 경고 신호”등 분석 범주와 기법이 다양하고 정교해졌다.

LA자살예방센터가 자살 사례ㆍ현상에 대한 연구ㆍ대응 중추기관으로서 명성을 얻어가면서 경찰 학교 병원 군대 관공서 등의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벼랑 바깥으로 한 발쯤 내디딘 듯한 절박한 상담 전화들도 걸려오곤 했다. 그들은 63년 ‘생명의 전화’로 알려진 상설 자살 상담전화를 개설했고, 파베루는 하루 서너 시간씩 직접 전화에 응대했다. 10년도 안 돼 LA자살예방센터 생명의전화는 20명의 전문가가 교대로 24시간 대기하며 상담해야 할 만큼 중요한 상담 창구가 됐고, 미국 내 100개가 넘는 상담 단체가 설립됐다.(Telegraph, 15.9.16) 그들의 상담은 자살 예방 활동인 동시에 사례 연구의 창구이기도 했다.

62년 LA카운티 경찰은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숨진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1926~1962)의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LA자살예방센터에 심리부검을 의뢰한다. 음모론자들의 이설이 지금도 떠돌지만, 경찰은 파베루 등의 진단에 따라 먼로의 죽음을 자살로 발표했다. 3년 뒤인 65년, 파베루는 자살 위기 상황에 가장 먼저 개입할 수 있는 경찰의 자살 시도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별도의 훈련과정을 개설하기도 했다.

슈나이드먼은 66년 센터를 떠났다. 그는 연구전문기관인 ‘미국 자살학 위원회(American Assn. of Suicidology)’를 설립하고 70년 UCLA 교수(사망학과)가 됐고, 저술 및 강연 등으로 학술적인 활동을 주로 펼쳤다.

파베루는 센터에 남아 상담과 연구를 병행했다. 그는 81년 자살로 동생을 잃은 저넷 벨런드(Janet Belland)라는 자원봉사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친지를 잃은 이들이 겪는 분노와 수치심, 죄의식 등 복합적인 슬픔을 치유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LAObserved’ 기자 데이비드 데이비스(David Davis)가 여동생을 자살로 잃은 게 그 무렵이었다. 그는 피상담자로서 파베루를 만났고, 첫 인상을 이렇게 썼다. “그는 자신을 ‘파베루 박사’나 ‘노먼’이 아닌 노엄(Normㆍ평범, 일반)’이라 소개했다.(…) 그는 그의 (저명한)이름을 장식처럼 활용하려 하지 않았다.” (LAObserved, 15.9.17)

“파베루는 내가 만난 최고의 청취자(the most compassionate listener)였다. 그는 기이할 정도로 침착했고, 심리적 수렁에서 빠져 나와 뭔가를 말하기 위해 필요한 침묵을 허락할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이 뭔가를 설교하고 또 판단하는 자리가 아니라 ‘생존자’에게 뭔가를 배출하고 욕하고 허물어져도 좋은 해방구를 제공하는 자리에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90분 간의 상담을 시작하며 ‘지난 한 주 어땠어요?’라고 묻고는 한 상자의 휴지가 눈물로 다 젖어 비워지는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다가, 흘끔 시계를 보곤 ‘미안합니다. 다음주를 위해 여기서 멈춰야 할 것 같아요’라며 끝낸 적도 있다.(…) 그렇게 8주 과정이 끝난 뒤 우리 생존자들은, 여전히 눈물이 마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웃고 서로 포옹할 수 있었다.(…) 우리는 살아 남았고, 스스로 알던 것보다 조금 더 강해졌음을 알게 됐다.” 데이비스는 “그룹세션이 진행되는 동안 그가 세계적인 심리학자라는 사실을 알아챈 이는 거의 없었다”고, “그가 은퇴 후 근 20여 년 동안 단 한 푼도 받지 않으면서 그 일을 계속했다는 사실도 밝혀야겠다”고도 썼다.

LA자살예방센터는 1997년 이후 ‘디디-허시 정신보건서비스(DHMHSㆍDidi Hirsch Mental Health Services)’에 통합 운영돼왔다. 30년대 대공황기 실직 여성들의 실의를 치유하는 목적으로 설립된 민간 자선단체인 DHMHS는 시대 상황에 따라 빈민, 소수인종 등 소외 계층 정신 보건 증진을 위해 일해왔다. DHMHS 디렉터인 심리학자 키타 커리(Kita Curry)는 파베루 헌정 비디오에서 “파베루는 자살의 ‘오점’을 지우기 위해 헌신한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자살하려는 이들이 겪는 극심한 고통을 누구보다 앞서 이해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2014년 파베루는 미국 자살학회 학술대회 비디오 연설을 통해 “전화 한 통화 같은 아주 사소한 우정만으로도 자살을 막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겐 늘 굉장한(impressive) 일처럼 여겨졌다”고 말했다. 그는 저 ‘소박한’ 말로 자신의 학자이자 봉사자로서의 생애와 자살학의 역사를 포괄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살과 자유죽음은 동의어는 아니다. 노먼 파베루가 막고자 한 모든 자살이 아메리가 옹호한 자유죽음도 아닐 것이다. 심리부검을 포함한 자살 연구와 예방활동, 또 자살 후 생존자에 대한 심리 치료의 목적이 “(자살자) 본인보다는 가족, 나아가 사회의 보상심리에 달려 있다”던 아메리의 비판에는 물론 부인하기 힘든 진실이 있고, 여전히 자살을 죄악시하는 종교와 관습과 법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아메리의 목소리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심리학과 자살학이 자유죽음의 “존엄성을 박탈”한다는 아메리의 단죄는 아무래도 가혹해 보인다. 적어도 파베루와 슈나이드먼 같은 이들이 그의 지적에 고분고분 수긍할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아마 아메리가 책에서 예 든 숱한 이들의 자살이 모두 그의 기준에 부합하는 자유죽음이었는지 심리 부검을 통해 규명하자고 따져 물을 것이고, 아메리는 삶의 외통수를 판별하는 판관은 개인과 사회이지만 둘의 판단이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조금은 냉소적으로 응수할 것 같다. 그렇게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사례와 철학적 논리로, 끝도 없이 맞설 테지만, 그러다가도, 전선(戰線) 너머에서 ‘자살=죄악’투의 해묵은 주장이라도 들리면 금세 돌아서서 동지로 싸웠을 것 같다.

자살과 자살 인식에 대한 그들의 싸움 덕에 우리는 자살이라는 죽음의 한 형태와 거기 이르는 삶의 보편과 특수를, 또 순간순간 삶의 양상을 조금은 더 느긋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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