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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교과서 8종 쟁점 비교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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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교과서 8종 쟁점 비교 ③

입력
2015.10.2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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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

제주 4·3사건 민중들의 희생 기술

교학사는 우익세력 피해에 초점

검인정 역사 교과서 8종.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검인정 역사 교과서 8종.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다. 세계대전의 종전은 냉전으로 이어지고 한반도를 자기 세력권에 두려는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신탁통치하게 된다. 미소는 신탁통치의 해소와 자치국가 수립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공동위원회를 열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이 난다. 이 시기 남한의 정국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과 남조선노동당을 이끄는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다. 한반도 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고, 1947년 유엔총회에서 남북한 총선거를 치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좌익은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거에 불참하기로 결정했고, 이승만과 한민당 등 우익세력은 단독정부 수립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며 남한 만의 단독선거를 추진한다. 남한의 좌익세력들은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미군정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들도 희생된 제주 4ㆍ3사건이 발생한다. 극심한 혼란 끝에 1948년 5월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고 같은 해 8월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같은 해 9월 북한에서도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되면서 본격적인 분단의 길에 들어선다.

여의도연구원은 이 시대를 ▦해방의 원인 ▦미국의 원조 ▦제주 4ㆍ3사건 등 3가지 항목으로 구분 해 각 교과서의 서술을 비교하고 있다. 미래엔, 천재교육 등은 독립의 요인으로 식민통치하 민족의 독립운동에 의미를 부여한 반면, 교학사는 대외적 요인 위주로 서술하고 있다. 좌우 이념갈등이 폭발한 ‘4ㆍ3사건’의 경우 교과서 별로 민중들의 피해(미래엔), 우익세력의 피해(교학사) 등 각각 다른 시각으로 서술했다. 이신철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교수는 “3ㆍ1 운동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헌법 정신을 감안하면 독립운동을 해방의 원동력 꼽는 것은 자연스런 결론”이라며 “좌우 이념대립 과정에서 민중의 희생이 컸다는 점 역시 근현대 역사가들이 합의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8.15때 출옥한 애국투사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는 군중들.
8.15때 출옥한 애국투사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는 군중들.

▦한국 독립의 원인과 배경

1)미래엔

광복은 연합국의 승리로 얻어진 것이지만, 우리 민족이 끊임없이 전개한 독립운동의 결과이기도 하였다.(308쪽)

2)천재교육

1945년 8월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였다. 한편 소련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로 진격하였다. 이에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고,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연합국의 한국 독립 약속은 대내외적으로 꾸준히 전개해 온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국제 사회가 인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에 승리한 연합국은 한반도 문제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처리하여, 한국의 완전한 독립은 바로 찾아오지 않았다. (297쪽)

3)교학사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되었다. 이에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치안 유지를 위하여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남북에 주둔하게 되었다.(303쪽)

개괄 : 독립의 원인으로 대외적 요인과 함께 우리의 독립노력을 어느 정도 기술했는지가 핵심이다. 미래엔, 천재교육 등은 연합국 승리와 함께 우리 민족의 끊임 없는 독립운동이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점을 언급했다. 반면 교학사는 자주적 독립노력에 대한 언급 없이 연합국의 원폭투하로 일본이 항복 선언을 해 식민지배에서 벗어났다는 내용만 서술했다.

▦해방 이후 미국의 원조에 대한 평가

1)비상교육

당시 한국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미국의 경제 원조였다. 미국의 원조는 식료품, 의복 등의 생활필수품과 밀가루, 설탕, 면화 등과 같은 소비재 산업의 원료에 집중되었다. 미국에서 대량의 농산물이 들어오면서 식량 문제는 다소 해결 되었지만 국내 농산물의 가격이 폭락하였다. 그 결과 농촌에서 실업이 증가하는 등 농업 기반이 약화되었다. 미국의 경제 불황으로 1950년대 말부터 원조가 감소하고, 무상 원조가 유상 차관으로 바뀌면서 우리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졌다. (359쪽)

2)천재교육

전후 복구 사업에는 미국의 원조가 큰 힘이 되었다. 미국의 원조로 국내에 식량과 의복, 의약품 등 생활 필수품이 들어왔으며, 원조 물자를 가공한 면방직업, 제당업, 제분업의 삼백 산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시멘트 공장과 비료 공장 등의 건설, 철도와 항만 보수, 발전소 건설과 같은 기간 산업이 복구되어 갔다. 1957년에 이르면 주요 산업 기반과 공장이 대부분 복구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후 한국 경제는 연 5% 내외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였으며, 국민 총생산과 국민 총소득도 늘어났다. 생활 필수품을 중심으로 한 원조로 소비재 산업이 어느 정도 발전하였지만, 철강, 기계와 같은 생산재 산업의 발달은 부진하였다. 한국 정부는 원조 물자를 팔아 회수한 대금에서 상당부분을 국방비로 충당해야 했으므로, 이 대금을 산업 시설에 재투자할 수 없었다. 또한 원조 물자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정경유착이 발생하였다. 또한 미국의 농산물이 대거 수입되면서 국내의 농산물 가격이 하락하여 농가 소득이 낮아졌으며, 면화와 밀 생산이 큰 타격을 받았다. 이는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할 수밖에 없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316쪽)

3)교학사 (여의도 연구소 자료에는 미수록. 주제에 맞는 부분 교과서에서 직접 발췌)

한국의 전후 회복은 미국의 원조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신생국 한국은 미국의 지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1958년부터는 미국의 긴급성 원조가 줄어드는 대신 한국의 경제 개발을 돕기 위한 장기 원조가 검토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경제 개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원조 물자는 미국으로부터 무상으로 제공되었으나 판매 수익을 특별 회계에 편입되어 경제 재건에 사용되었다. 빈곤과 전쟁으로 인하여 세금을 거의 징수할 수 없는 조건에서 미국의 원조 물자로 확보하게 된 재정은 전후 경제 재건과 1950년대의 경제 유지에 절대적이었다. 전후 경제 재건 자금의 90% 이상이 원조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1950년대 후반에 정부 재정에서 원조로 이루어진 자금의 비중이 50%가 넘었다. -- 대한민국은 어려운 시기에 미국의 지원을 받았고 이를 통해 성장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1950년에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 소득은 70달러 정도였다. 전쟁 이전 상황으로의 복구는 1955년에 가서 이루어졌다. (316~317쪽)

개괄: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경제원조가 우리나라 재건에 중요한 기반이 됐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기술했다. 하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에 대한 서술은 차이가 있었다. 비상교육 등은 대량의 농산물 수입으로 국내 농산물 가격 하락 및 농가소득 감소가 초래됐다고 서술했다. 교학사의 경우, 대외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검인정 역사 교과서 8종.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검인정 역사 교과서 8종.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4ㆍ3 사건에 대한 평가

1)미래엔 (여의도 연구소 자료에는 미수록)

제주도의 3ㆍ1절 기념 행진에서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주민들은 항의 시위를 벌였다.(1947.3.1) 시위자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일반인이 체포되자, 미군정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이 높아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주도의 좌익 세력은 5ㆍ10 총선거를 앞두고 단독 선거 저지와 통일 정부 수립을 내세우며 무장봉기하였다.(1948.4.3) 미군정은 무력 진압을 시도했지만, 3개 선거구 중 2곳에서 선거가 실시되지 못하였다.

2)천재교육

이러한 가운데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 아래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와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무장 봉기 세력은 각지의 경찰서와 서북 청년회 등 우익단체를 습격하였고, 미군정은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 진압에 나섰다. 이후 무장 봉기 세력과 토벌대 간의 유혈 충돌은 극한 상황으로 치달아 수만 명의 제주도민이 희생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제주 4ㆍ3사건). (309쪽)

3)교학사

1948년 5ㆍ10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이에 남조선 노동당이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남한에서의 단독 총선을 거부하도록 지시하면서 파업과 시위가 이어졌다. 제주도에서는 4월 3일 남로당 주도로 총선거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켜 경찰서와 공공 기관을 습격하였다. (2013년 8월 검정본: 이에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의 주도로 총선거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 경찰서와 공공 기관이 습격 받았다.)이때 많은 경찰들과 우익 인사들이 살해당하였다. (이 과정과 이후 진압 과정 등에서 일부 군인과 경찰, 우익 인사가 희생되기도 하였다. 당시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이 있었다) 한편, 제주도의 봉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가 여수 주둔 14연대에 진압 명령을 내렸으나 14연대 내의 남로당게 좌익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들은 여수를 장악하고 인민 재판소를 설치하여 우익 인사들을 살해하였다. 반란은 순천 지역까지 확대되었고 수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여수ㆍ순천 10ㆍ19사건). 이후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계속하였다. 남한 정부의 수립을 전후하여 남로당 지도부는 월북하였다.(305쪽)

개괄: 남한 만의 단독 선거를 막기 위해 남로당 주도로 무장봉기가 일어났고 이를 미군정이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제주도민이 희생당했다는 얼개는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천재교육은 양쪽 간의 극한 충돌에, 미래엔은 미군정에 대한 주민들의 높은 반감에 초점을 맞췄다. 교학사의 경우, 4ㆍ3 및 여수반란 사건으로 수 많은 우익인사들이 살해당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대혁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김현수기자 ddackue@hankookilbo.com

김민정기자 fac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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