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화, 자유·민주주의에 어긋나
헌법 명시 교육의 자주성·정치중립성
법률도 아닌 장관 고시로 흔들어
뉴라이트 사관, 헌법 전문 정신 훼손
정부와 여권 관계자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헌법 가치를 거론하는 것에 대해 국내 주요 헌법학자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자체가 헌법에 위배된 일”이라며 “헌법이라는 단어를 오ㆍ남용 하지 말라”고 한 목소리를 냈다.
20일 본보와 통화한 한국헌법학회(학회장ㆍ박종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소속 헌법 전공 교수 5명은 전원이 국정 교과서 도입이 대한민국 헌법 조항 및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고 응답했다. 한국헌법학회는 헌법 전공교수와 헌재 연구관 등 헌법 관련 실무자 대부분이 회원으로 가입된 헌법관련 국내 최대 연구단체다
정부에 따르면‘헌법 가치’는 새로 쓸 국정 역사교과서의 핵심가치다. 교육부는 주요 일간지에 게재된 국정교과서 홍보광고에 “대한민국의 헌법 가치에 충실하게 만들겠다”는 문구를 넣었고, 황우여 교육부 장관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등도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며 “헌법 가치를 구현하는 올바른 교육을 하겠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헌법학자들은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추진은 헌법상 기본 원리인 ‘자유 민주주의 기본 질서’에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했다. 김선택 고려대 법학전문대학교 교수는 “대한민국 헌법의‘자유 민주주의’에서 ‘자유’는 독재에 반하는 개인의 인권 존중을, ‘민주주의’는 가치관의 다양성과 상대성을 의미한다”며 “자유 민주주의를 어떤 고정적인 질서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헌법을 완전히 오독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방승주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국가가 정한 하나의 관점을 강요하는 국정 교과서는 헌법이 정한 자유 민주주의에 대척점에 서 있다”고 비판했다. 정부 여당은 그간 헌법상 ‘자유 민주주의’정신을 담아 역사교과서를 만들겠다는 말을 반복해왔다
헌법학자들은 국민의 교육권을 명시한 헌법 조항과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했다. 방 교수는 “헌법 제 31조 6항에 교육의 자주성ㆍ정치적 중립성 등이 법률에 의해 보장된다는 내용이 적시 돼 있다”며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규칙보다도 낮은 수준의 장관 고시로 헌법에 명시된 교육의 자주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통째로 흔들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검ㆍ인정을 통과한 다양한 교과서 중 하나를 채택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헌법에 보장된 교육의 자주성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뉴라이트 성향의 일부 학자들만 국정교과서를 집필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들은 우려를 표시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948년을 대한민국 건국일로 보는 뉴라이트 사관은 1919년 수립돼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의 거점이 됐던 상해 임시 정부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이는 ‘3ㆍ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정신을 훼손시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선택 교수는 “헌법 정신과는 무관하게 일제 시대 독립 운동의 역사가 축소되고 건국 이후 산업화의 역사만 부각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가 국정화 홍보 논리로‘헌법 가치’를 제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외국 언론인들도 이미 비판한 바 있다. 지난 16일 외신 기자를 상대로 한 기자회견에서 정부는 “새로 만들 교과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헌법 가치를 토대로 쓸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자유민주주의는 다양성, 시장경제는 선택의 자유가 핵심인데 정부의 역사국정화 추진은 오히려 이와는 거리가 먼 것 아니냐”는 외신 기자들의 지적이 쏟아졌다.
김민정기자 fac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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