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의 모험
제임스 워드 지음, 김병화 옮김
어크로스 발행, 376쪽ㆍ1만6,000원
연필, 볼펜, 클립, 스테이플러, 수첩, 공책, 풀, 지우개, 포스트잇, 형광펜, 압정…. 책상 위나 서랍에 굴러다니는 이 자잘한 것들로 시시콜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쓰다니. 각종 문구류의 역사부터 각각에 깃든 일화, 그리고 그것들이 일상에 새겨 넣은 다채로운 풍경까지 재미있게 펼쳐 놓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읽다 보면 슬며시 웃음을 짓거나 오래 잊고 있던 추억을 떠올리게도 하는 책이다.
저자 제임스 워드는 런던문구클럽의 공동창설자다. ‘나는 지루한 것을 좋아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매년 ‘지루함 컨퍼런스’라는 별난 행사를 열어 무심코 넘겨버리는 사소한 것들을 재발견하기를 즐긴다. 이런 책을 쓸 만한 사람이겠다.
영국 소도시에서 자란 어린 시절, 동네 문구점에서 사온 문구류 정리함의 추억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섯 칸짜리 상자의 첫 칸에 클립이 67개 들어있더라고 별 걸 다 기억한다 싶더니 클립의 탄생과 진화, 디자인으로 넘어간다. 철사를 구부린 단순한 형태의 종이 클립은 1899년 노르웨이 발명가 요한 볼레르(1866~1910)가 발명했는데, 나치 점령 당시 노르웨이 사람들은 저항의 상징으로 그 클립을 달고 다녔다. 클립이 종이를 한데 묶어주듯 점령군에 대항해 뭉치자는 표시였다.
정육점의 실수로 압정이 박힌 돼지고기 음식을 먹고 다친 한 가정주부가 피해 보상금을 받은 1932년 판결처럼 사소한 일화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깃털펜이 만년필이 되기까지를 들려주는 대목만 봐도 고대 문헌부터 제조업체의 최신 광고까지 오지랖 넓게 자료를 훑는다. 금속제 펜촉의 탄생과 보급을 설명하려고 2000년 전 그리스 문헌, 7세기 기독교 성인이 남긴 기록, 10세기 이슬람 역사가의 책, “그 촉은 칼처럼 날카롭고 중상모략자의 혓바닥처럼 가슴을 파고든다“며 “악의 진짜 근원“‘이라고 규탄한 19세기 프랑스 작가의 분노를 말한다. 미국과 소련의 우주 개발 경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에 우주에서도 쓸 수 있는 무중력 펜을 개발한 미국인 이야기도 나온다.
이 책에서 특히 재미있는 대목은 마음에 꼭 드는 문구류를 고집한 유명 작가들의 에피소드다. ‘찰리와 초콜릿공장’의 로알드 달은 매일 아침 그날 사용할 딕슨 타이콘데로가 연필 여섯 자루를 뾰족하게 깎은 다음에야 일을 시작했고, ‘분노의 포도’를 쓴 존 스타인벡은 작가 생활 내내 완벽한 연필을 찾아다닌 끝에 “종이 위에서 활강하며 미끄러지는“ 블랙윙 602에 안착했다. 까만 표지에 고무줄 밴드가 달린 몰스킨 노트가 명품으로 꼽히게 된 데는 이 노트를 애용한 헤밍웨이, 피카소 같은 작가와 예술가의 전설이 결합했기 때문이다. 색인 카드에 글을 써두고 이리저리 퍼즐 맞추듯 소설을 완성해나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초고는 꼭 연필로 쓰고 노란 색 리걸 패드를 사용한 노벨상 수상작가 토니 모리슨 등에게 문구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창조적 영감을 주는 동반자였다.
이밖에 미국 학교 교실의 필수품이 된 핑크펄 지우개, 오타 때문에 구박받던 타이피스트가 발명한 수정용 잉크, 접착력이 떨어져 애물단지이던 풀을 사용한 포스트잇의 성공 등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장면은 곧 문구와 함께 해온 일상을 보여준다. 종이의 규격이 통일된 내력, 침을 발라 붙이면 되는 우편봉투가 등장한 초기에 청첩장 발송용 봉투를 붙이다가 유독성 접착제 때문에 쓰러진 신부, 문구류의 특허와 개발을 둘러싼 업체들의 경쟁 등 다양한 장면들이 오밀조밀 등장한다.
매년 연말이면 새해에 쓸 다이어리 수첩을 사던 사람들이 이제는 스마트폰의 메모앱으로 도구를 바꿨다. 손글씨보다는 타이핑과 터치가 익숙해진 디지털시대에 문구류에 뜨거운 애정을 표시하는 저자는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를 감추지 않는다. 몰스킨이 기존 종이수첩에 에버노트 메모 앱을 결합한 스마트 노트북을 내놓고, 이메일 전성시대인데도 만년필 판매량이 늘어나는 현상을 보면 전통 문구류는 앞으로도 건재할 것 같다. 저자는 문구류에 대한 무한 애정 선언으로 본문을 마무리했다.
“문명이 처음 밝아올 때부터 존재했던 문구는 인터넷 따위의 엉성한 신출내기가 싸움을 걸고 자신을 죽이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터널에 갑자기 들어가더라도 펜은 작동이 중단되지 않는다. 연필로 쓸 때는 배터리가 닳아 충전기를 빌릴 일이 없다. 몰스킨 공책에 글을 쓸 때는 내용을 미처 저장해두기도 전에 오작동의 경고가 뜨거나 프로그램이 다운되는 사태가 일어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 펜은 죽지 않았다. 펜이여 영원하라.“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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