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후 2시 서울시립미술관 지하 1층 강당에서 고 천경자 화백의 유족들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유족 중 장녀 이혜선(70)씨는 불참하고 장남 이남훈(67)씨, 차녀 김정희(61)씨, 사위 문범강씨, 차남 고 김종우씨의 아내인 며느리 서재란씨가 참석해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다음은 차녀 김정희(61)씨가 발언한 기자회견 전문이다.
먼저 저희 어머니이신 천경자 화백님께 뜨거운 관심과 애정을 표해 주신 이 자리에 같이하신 여러분들께 저희는 깊이 감사 드립니다.
저희는 어머님이 지난 8월 6일에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지난주 10월 19일, 미국시간으로 10월 18일에 접하게 됐습니다. 저희 언니, 장녀인 이혜선씨로부터 직접 연락을 받은 바는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어머니 별세 소식은 10월 19일 한국의 어느 은행으로부터 유족들에게 천경자 화백의 은행 계좌 해지 동의를 요구하는 전화를 받고서야 그제서야 알게 됐습니다.
갑작스런 비보와, 특히나 8월 6일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망연했습니다. 며칠 동안 이 일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시름에 젖어 있었습니다. 천 화백님의 유골함이 지난 8월에 서울시립미술관의 수장고를 한 바퀴 돌고 갔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그런 일이 언론에도 알려지지 않고, 가족은 물론, 어머님을 많이 사랑했던 사회에 알려지지 않을 수 있었는지 무척 망연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가슴이 아팠던 것은, 어머님께서 생활은 무척 검소하셨지만 작품처럼 열정적이고 화려한 것을 많이 좋아하셨습니다. 어떻게 애도도 할 기회가 없고, 어머님을 사랑하셨던 많은 분들께 한 번이라도 인사할 기회를 주지 않고, 그렇게 돌아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고인의 업적에 부합이 되지 않는, 적절하지 못한 일이었다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 여러 소식에 의하면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어머님께 문화예술인으로서는 최대의 영예인 금관 문화훈장을 수여할 고려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체부는 최근 활동이 없었고, 죽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있다는 이유로 훈장을 수여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평소에 지병이 있으셨는데 말년에 작품 활동이 늦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식들이 못나서 이런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이 훈장을 주지 못할 이유가 된다는 사실에 말로 다 하지 못할 비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가시는 길에 어머님의 생애와 업적에 부합되는 마지막 길을 가실 수 있도록 하고 싶어, 이렇게 급작스레 기자회견을 열게 됐습니다.
저희가 기자회견을 열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두 건의 건의 사항입니다. 먼저 서울시에 건의 드리겠습니다. 천 화백님을 사랑했던 모든 분들이 고별을 할 수 있도록 추모식을 열고자 합니다. 국민이 사랑하는 화가인 천 화백의 추모행사에 적극 나서 예우를 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현재는 부득이 유족이 서울시립미술관에 직접 청원을 해서, 서울시립미술관이 10월 30일 오전 10시에 행사를 치르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미술관이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신 것에 감사 드립니다. 다만 밝힐 것은, 미술관은 자리만 마련하고 행사를 치르는 것은 유족 당사자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문화체육관광부에 건의 드리겠습니다. 문체부가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는 언론 보도가 잠시 있었다가 취소된 이유가, 별세 전 수 년간 작품활동이 없었다는 것과, 사망에 얽힌 미스터리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이 두 가지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첫째로 작가가 노년에 건강의 악화로 작품활동을 상당 기간 못하였다는 이유로 생애 수십 년간의 업적과 공로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문화국가가 작가에 취할 예우가 아니라고 봅니다. 예술가의 평가는 작품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의혹을 해명하겠습니다.
장녀 이혜선씨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수 년간 지속하여 유족들이 엄청난 고통을 받았지만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머니이신 천경자 화백의 명예에 누가 되는 것을 누구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어려서부터 어떻게 하든 어머니 성함 석 자에 누 끼칠 일은 말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랐습니다.
저희 어머님은 평소에, 다른 가정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재산을 놓고 가족끼리 분쟁이 났다고 할 때 추접하다 하시면서 굉장히 싫어하셨고, 저희는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어떤 잡음도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언니의 심정도 이해를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만 원망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장녀 외 다른 자식들이 작품을 팔려고 한다는 사실과 다른 보도가 나갔습니다. 정식으로 정정을 요청하고 싶습니다.
어머님은 제(차녀 김정희씨)가 지난 4월 5일에 뵈었고, 8월 6일자로 돌아가신 것도 맞습니다. 사망신고에 첨부된 의사의 사망진단서도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에 의혹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지난 겨울에 어머님 많이 편찮으실 때도 수 차례 찾아가 뵈었습니다. 그럼 왜 이 만남이 이어지지 못했는가? 이해하시기 힘드시겠지만, 차단을 많이 당했습니다. 찾아갔을 때 경찰에게 체포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걸 밝혔을 때 무슨 말이 나오겠는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명확한 해명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과드립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희는 언니의 심정을 이해 못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많은 분들을 만나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고 있던 저희가 기자회견을 해서 여러분과 귀한 시간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오늘 참석해 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어머니께서는 한국을 사랑하셨고, 국민을 사랑하셨고, 한국에 오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역경을 딛고 작품혼을 불태우시는 모습에 감동을 받은 많은 국민들이, 한 분 한 분 오셔서 어머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으면, 하는 것이 저희들의 바람입니다.
-10월 30일 추모제를 연다는 것인가?
=그렇다. 어머님께서는 당신 작품을 소중하게 여기셨는데, 그런 작품을 서울시립미술관에 93점을 온전히 기증하지 않았나. 서울시에서 응당한 대우를 해주면 좋겠다.
-서울시에 요구하는 정당한 대우라 하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뒤늦었으나 서둘러 가족 주체로 추모식을 마련하게 됐는데 정당한 성의와 예우를 표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인 것이다. 저는 여기 관례도 잘 모른다. 어머님이 흡족하실 만큼. 어머님께서 이때까지 쌓아온 업적에, 대범하게 작품을 기증하신 생애에 맞는 대우를 받으실 수 있으면 좋겠다.
-4월 5일에 어떻게 만났나?
=어머님께서 2003년에 뇌일혈로 쓰러지셨다. 당시 상황을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표현하기는 솔직히 힘들 것이다. 하지만 어머님 평소에 매우 고귀한 자세를 취하신 분이셨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진 않겠다. 2014년 12월 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하셨고 그래서 수 차례 병석에서 간호를 했고 그 만남이 4월까지 이어진 것이다.
-유족 소장작품 있나?
=없다. 언니는 잘 모르겠다. 언니가 모든 일을 관장하고 작품을 관리하는 데 있어 한번도 관여해 본 적 없다.
-이혜선씨와 갈등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나.
=이혜선씨는 혈연으로 이어진 언니고 같이 유년기를 보냈다. 언니는 모든 것을 직접 하는 걸 원했다. 사이가 좀 좋아졌다가도 잘 안 풀릴 때는 안 풀리고를 반복했습니다.
-장녀는 왜 집에 오는 걸 반대했나?
=이해할 수 없는 인격과 행동에 대해서 제가 전문가가 아니니 뭐라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신 건 언제인가?
=손만 잡아도 의사소통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걸 규정하긴 힘들 것 같다. 수년간 만났다 헤어졌다가 계속됐다.
-유골은 어디 모셔져 있나?
=저희도 어머님께서 어디 계시는지 알고 싶다.
-서울시에서 사망 사실 알고도 공개 안 한 것에 대해서 불만이 있나?
=공공기관으로서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그 부분보다 지금까지 어머니를 보내드리는 예우가 없었다고 생각하고 그 부분에 시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미인도 위작 논란에 대해 유족으로서 밝힐 사항은 없나?
=그 사건으로 어머니께서 많이 상처를 받으셨다. 자기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 했는데. 자식의 입장에서는 언젠가 밝혀야 될, 혹은 언젠가 밝혀질 그런 사건이라 생각이 된다. 그걸 미술 연구하시는 분들이나 누군가 파고들어서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건 이후 어머니께서 직접 말씀하신 건?
=어머니께선 강인하신 분이다. 플로리다 여행을 떠났을 때 동행했는데, 어느새 풍경을 스케치하고 계셨다. 작품 세계는 감성적이고 화려하다 그런 평을 많이 듣지만 실제 성품은 매우 강인하셨다.
-위작이라는 입장이 바뀌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런 적 없다.
=사위: 제 와이프도 화가이고 미대 교수다. 저 역시 교수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사건이 발발했을 때 서울을 방문했었다. 그 사건 터지기 전에 가짜 그림이 프린트가 돼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홍보 차원에서 싼 가격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보급을 했는데, 어느 사우나 지하실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며칠 뒤에 그 사건이 터지게 됐다. “미인도가 팔리고 있다”고 제자가 말했다. 그래서 팔려나가는 그림을 가져와라 해서 보고, 천 선생님이 내 그림이 아니니 내줄 수 없다고 한 적이 있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직원이 가져온 200자 원고지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당시 우리가 검증하지 않고 매입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재산이기 때문에 돌려줘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돌려준 일이 있다.
그리고 나서 미술관에서 근거로 내세운 것이 천경자 선생님 물감하고 작품에 쓰인 물감하고 재질이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물감을 천 선생님만 사용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그것은 누구나 구할 수 있는 석채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은 재료 이야기만 하고 작품에 대한 미학적인 검토를 전혀 하지 않았다. 당시 감정위원으로 참여했던 분들이 분위기에 휩쓸려 그랬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금 상황을 유산 분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렇게 보는 기사 때문에 기자회견을 하게 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일관되게 말하는 바는 어머님께 누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유산 권리를 법적으로 주장하실 건가?
=일단 무엇이 남았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공식적으로 무엇을 요구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논의한 적이 없다.
-이해가 되지 않는데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왜 바로 움직이지 않았나? 어떤 요구도 하지 않겠다는 건가?
=사위: 많은 분들이 연락 주셨다. 죄송하단 말씀 드린다. 하지만 저희는 조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야 천경자 선생님께 누가 되지 않을지 고민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진료비용이 많았을 텐데 큰언니는 어떻게 비용을 마련했나?
=언니가 미국으로 떠날 때 금융 자산 등 모든 전권을 독점적으로 운영했기에 그렇게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된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언니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로 삼아온 희생적인 딸이다.
-예술원에서 의료기록이나 사진 등을 요구했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물론 저희도 제의를 했지만, 상당히 격한 반응을 보이셨다.
-작품 관리 권한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은데.
=그 부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어머니와 언제까지 같이 살았나?
=미국에 가시기 전까지 함께 살았다.
-개인사를 여쭤봐서 죄송한데, 둘째 따님은 법적으로는 호적상 관계가 없겠는데.
=그렇다.
-장남은 법적으로 유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데?
=장남: 누님이 일단은 독단적으로 진행을 해 온 것이긴 한데, 굉장히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기도 해서, 제가 권리를 주장한다든가 그런 건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반대편에서 나머지 형제들이 어머님 작품 팔자고 했다고 주장하시는데 그런 짐작이 가실 만한 사건은 있었나?
=없다. 저희는 어머님 작품을 소유물로 생각하거나 한 적은 없었다.
-관리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을 내실 수 있다는 건가?
=잘 모르겠다. 서울시립미술관의 관리가 계약서에 위반된 점이 있다면 시정해야겠지만, 그 내용을 저희가 잘 모르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작품 관리에 대해서, 생전에 작가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던가?
=개인 미술관을 갖고 싶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고 때에 따라 변했다.
-언니에게 바라는 점은 없는 건지?
=제일 중요한 거는 어머님을 어디에 모셨는지 알려달라는 거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것을 (함구한 것은) 무슨 이유가 있더라도 사실 이해하기 힘들다. 어디에 모셨는지를 다른 자식들한테 알려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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