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에 대한 학계 전반의 반발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책 역사연구 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진들도 “시대착오적 국정화 추진을 즉각 중단하라”며 정부를 정면 비판하고 나섰다. 정부 산하 연구 기관 소속 학자들조차 국정화 강행에 강한 유감을 표명하고 집필 거부를 선언하고 나선 셈이라, 교육부의 입지는 더욱 축소될 전망이다.
27일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진 8명은 ‘역사학 전공 교수들의 국정교과서 집필 거부’ 선언문을 공개하고 “국정 교과서가 한국사회가 일구어 온 국제적 위상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에 큰 우려를 표명하며, 만약 국정교과서가 추진된다면 집필은 물론 제작과 관련한 어떤 과정에도 참여하지 않기로 결의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국정교과서는 폭압이 난무하는 20세기 역사의 산물로,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고 화해와 협력을 추구하는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에는 박물관에서나 찾을 수 있는 구시대적 유물”이라며 “지금 다시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것은, 역사를 현실 정치 논리에 따라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면서 권력을 유지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학문의 자유와 교육의 자치를 보장하는 우리의 헌법 정신과도 위배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국사를 통틀어 국정 교과서 도입이 강행된 것은 일제와 유신시기뿐이었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이들은 “국가 권력의 역사교과서 독점이 일제 강점기에 시작된 것이며, 일제가 물러나면서 파기되었다가 유신 체제하에서 독재정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면서 다시금 국정교과서 제도로 부활된 것”이라며 “국정교과서의 도입은 세계가 주목하는 발전된 한국 사회의 위상과 품격을 훼손하는 수치스런 조치”라고 지적했다.
한국 정부는 물론 학계 전체의 평판을 심각하게 무너뜨릴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이들은 “국정교과서는 북한과 같은 독재국가나 후진국에서나 사용되고 있으며 2013년 10월 유엔인권이사회 문화적 권리 분야 특별조사관은 역사교과서 편찬에서 국가와 정부의 개입을 경계하는 보고서를 채택한 바 있다”며 “관련 국제 규범을 역행하는 이번 조치가 그 동안 동아시아 역사문제의 해결을 선도해 온 한국학계의 성과를 백지화할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가 일구어 온 국제적 위상과 품격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폐해는 심각하다”고 성토했다.
교수진은 특히 “좌편향”을 운운하며 이어지는 학자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폄하와 매도에 강한 유감을 드러내며, 정부를 향해 “국론분열을 그만두라”는 직격탄을 날렸다. 이들은 “국정화 추진 과정에서 자행된 정부, 여당 인사들의 자극적인 색깔론은 역사학자와 역사교육자가 쌓아 온 전문성을 무시, 폄하, 매도하고 국론분열과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또 “제대로 된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자극적인 문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현행 검정 한국사 교과서가 좌편향되었다고 공격하고 있지만 현행 교과서는 이명박 정부 하에서 만들어진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에 의해 집필되었고, 박근혜 정부의 검정·심의를 통과한 교과서”라며 “이는 역사교과서에 대한 이들의 판단과 조치가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좌충우돌하고 있는지 스스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학자들은 “더 이상 논쟁을 부추기지 말고 역사 연구와 교육의 전문성을 인정하면서 (교과서 집필을) 전문가에 맡겨두기를 바란다”며 “권력이 역사책을 바꾸려 할지라도 역사는 결코 독점되거나 사유화될 수는 없다는 것은 지난 오랜 세월의 교훈이자 경험”인만큼 국정화 계획을 지금이라도 철회하라고 호소했다.
또 이들은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 일부 교수가 현행 검정 교과서를 비판하면서 국정교과서 도입을 찬성하고 있어 마치 한국학중앙연구원 역사학 전공 교수들의 다수가 국정교과서를 찬성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지고 있지만 국정화 찬성 교수는 역사학 전공에서 오히려 소수임을 분명히 밝힌다”고 선을 그었다.
성명에 동참한 학자는 한국사학 전공의 신종원 권오영 구난희 심재우 오강원 이강한 교수와 고문헌관리학 전공의 전경목 옥영정 교수 등 모두 8명으로, 한국사학 전공 8명 중 6명이, 고문헌관리학 전공 전원인 2명이 참여했다.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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