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에는 항상 이름이 없다(道常無名).”
‘노자’의 한 구절이다. 사람들이 참 좋아하는 말이다. 한 인간의 삶보다 거대하고 풍요하고 신비한 존재(세계, 질서, 우주 등)에 대한 경외와 겸손을 담은 까닭일 것이다. 도에 이름이 없는 것은 도가 존재할 수 없거나, 존재하더라도 그 참됨을 몰라서가 아니다. 차라리 도가 언제든, 어디에서든, 어떤 모습으로든 변화무쌍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리라. 이곳과 함께 저곳에서도, 나한테와 동시에 너한테서도, 어느 한 군데 머무르지 않고 물처럼 흘러 다니면서 흐름과 고임, 복류와 분출을 되풀이하는 것. 따라서 무(無)는 실상 ‘없음’이 아니라 ‘많음(多)’으로 읽어야 한다.
서울 성균관대학교 앞 풀무질서점. ‘아직’ 있었구나, 감격에 가슴이 울컥한다. 학교 다닐 때 이런저런 일로 대학로 나올 때 가끔씩 들르던 곳인데, 자리는 조금 옮겼지만 사회과학서점 느낌 그대로 온전히 있다. 1985년 첫 이름이 생긴 때로부터 30년, 1993년 은종복씨가 이어받은 때로부터는 22년째다. 책 읽기 모임은 풀무질서점과 같이 있는 풀무질책놀이터에서 한 달에 한 차례 열린다.
모임 이름이 없어 더 자유롭고 열린 책 읽기
“모임 이름은 아직 없습니다.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통해 이어져 있던 시민활동가들이 이야기 나누다 각자 소속 단체에서 책모임을 한다는 걸 알았어요. 활동가끼리 모여서 책을 읽자고 해서 시작한 게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네요.”
풀무질서점을 운영하는 ‘풀벌레’가 말문을 연다. 모임에선 별명을 주로 쓴다. ‘청산별곡’ ‘히어리’ ‘풀벌레’ 등이다. 이름과 함께 얹혀 오곤 하는 나이나 신분이 대화의 평등성을 해칠 수 있음을 우려해서다. 물론 본명을 그대로 쓰는 사람도 많다.
모임은 2003년 시작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책 읽기 모임’으로 불린다. 노자의 뜻을 이어받은 것일까. 최근 두 해 동안은 풀무질서점을 도우려고 곁에 딸린 ‘풀무질책놀이터’에서 주로 모임을 가졌지만, 좋은 책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으면 어디나 찾아가서 모였다. 이름이 없기에 모든 곳과 이어질 수 있고, 모든 책을 같이 읽을 수 있으며, 모든 사람과 만날 수 있다. 인천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서 ‘책방 나비 날다’를 운영하는 ‘청산별곡’이 말을 받는다.
함께읽기 넘어 사회운동 연대로
“단순 독서 모임처럼 책 읽고 이야기 나누고 친목을 다지는 것 이상을 늘 생각합니다. ‘생태 평화 인권 나눔’을 실천하려는 이들을 연결해 상부상조하도록 돕는 일이 모임의 또 다른 목적입니다. 관련 지역, 출판사, 단체 등과 힘닿는 대로 같이 하려고 매달 순회하면서 모였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후원금 모으고 캠페인도 전개하는 등 사회운동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지하 1층 대여섯 평 남짓한 공간에 들어서니 빨간 앉은뱅이 상 하나가 눈에 띈다. 가족과 둘러앉아 상을 벌이면 밥상이고, 교과서를 깔고 공책을 놓으면 책상이고, 대바늘과 실 뭉치를 올려놓으면 작업대이고, 과일 담긴 접시를 올려두면 응접탁자다. 지금은 청년 여럿이 같이 지은 ‘대학 거부 그 후’(교육공동체 벗)가 그 위에 놓이고, 주변으로 일고여덟 명이 둘러앉아 있다. 완전한 책 모임 자리다. 채식생태활동가인 ‘히어리’가 말한다.
“책도 좋지만 사람이 더 좋아서 모입니다. 저희는 돈 없이도 꿈을 크게 꿀 수 있는 사람들 모임입니다. 좋은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서로 도울 수 있도록 저희 모임이 쓰였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해도 웃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려고 늘 애써 왔습니다. 지역에 헌책방과 같은 의미 있는 공간이 생기면, 주인과 연락해서 그곳에서 모임을 진행합니다. 응원가는 거예요. 여기저기 연락해서 헌책방도 알리고, 근처에 지인이 살면 초대도 합니다. 주인과 안면을 트면 오다가다 들러 책을 사는 등 단골이 되기 쉬우니까요. 헌책방에 공지를 붙여 알리면 지역 주민이 관심을 품고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모임을 하면서 공간도 같이 홍보한다. 그곳에서 책을 구매하는 등 작은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느티나무헌책방,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이음책방, 아벨서점, 홍대 옆 책방 등 전국 곳곳의 작은 책방이 모임과 함께했다. 여성환경연대, 팔레스타인평화연대, 참살이연구원, 전국여성농민총연합회, 청년유니온, 초록당 등 시민단체들과도 같이 책을 읽었다. 경기 가평, 충남 홍성, 전남 고흥, 부산 보수동 등 뜻 맞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
수유리 유기농 칼국수집인 ‘재미난 밥상’에서 있었던 모임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가난뱅이의 역습’(김경원 옮김, 이루)의 저자 마쓰모토 하지메가 일본 편집자와 함께 모임을 일부러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도쿄 코엔지에서 재활용 가게 ‘아마추어의 반란’을 운영하면서 ‘가난뱅이 운동’을 하는 활동가다. 회원들이 추구하는 삶인 ‘자발적 가난’을 즐겁게 실천하는 덕분인지 느낌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청산별곡이 말한다.
“마쓰모토 하지메의 운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아마추어의 반란’도 같이 보고, 저자와 함께 책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그는 인간답고 또 즐겁게 사는 방식을 알려줍니다. 책을 읽는 동안 가난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밝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원동력임을 깨닫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힘도 나고 신도 났습니다.”
풀벌레가 말을 덧붙인다. “당시 상당히 지쳐 있었습니다. 촛불을 아무리 들어도 세상이 바뀌지 않고 오히려 탄압만 심해졌습니다. 그때 이 책을 읽었습니다. 마쓰모토 하지메는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들며 세상을 바꾸려고 합니다. 처음 읽고 나서는 이래서 세상을 바꿀 수 있겠어 하고 시시하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 더 읽고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어 보니, 돈에 눈먼 세상을 이렇게 즐겁게 까발리고 뒤집을 수 있겠구나 하고 손뼉을 절로 쳤습니다.”
웃음은 그 자체로 혁명일 수 있다. 권력은 사람들 발목에 진지하고 심각하고 무거운 추를 하나씩 덧달면서 삶의 무게를 더 많이, 더 크게 감당하라고 강요한다. 특히 현대사회의 권력은 ‘소비’라는 욕망의 고리를 무한정 부풀림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시간을 노동에 쓰도록 강제한다. 그러나 기나긴 노동을 통해 사람들은 한낱 ‘구매력’을 얻을 뿐, 자신을 위한 시간은 점차 빼앗기는 탓에 실제로는 우울과 불행의 연속을 살아갈 뿐이다.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하라’는 지상명령에 웃음으로 대응해 삐딱선을 타는 일은 그 자체로 권력의 시스템을 붕괴시킨다. 민중의 놀음이 주로 희극의 형태를 띠는 것은 우연만은 아니다. 소비를 거부함으로써 부풀려진 욕망의 풍선을 꺼뜨리려면 먼저 ‘빵 터지는 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그날 책모임이 끝난 후 마쓰모토 하지메가 술병을 든 자신의 캐릭터와 함께 사인을 한 후 옆에다 “부자들 다 덤벼!” “가난뱅이도 뭐든지 할 수 있다!” “가난뱅이들, 난리법석을 피우자!”라고 써주었다는데, 이 정도 유쾌한 기개가 있어야 가난 중에서도 항상 즐거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함께 공부하고 함께 꿈꾸며
모임에 나온 이들은 이십대 중반 취업준비생부터 환갑 가까운 교사까지 세대별로 고르다. 정승행씨는 1980년대 중반 학창 시절부터 풀무질서점의 단골로 드나들다 모임에 합류했다. 정씨가 ‘대학 거부 그 후’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한다.
“오늘날 대학은 자본의 세계화를 실현하는 하부단위로 전락했습니다. 하지만 자기 힘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대학에 가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이 문제에는 따로 정답이 없습니다.”
남현씨는 고등학교 철학교사로 지금 은퇴를 준비 중이다. 그가 말을 이어서 깜짝 놀랄 이야기를 한다. “어느 날 대학에 다니던 아들이 찾아와 자퇴하고 싶다고 해서 이 책을 읽었습니다. 큰일이구나 싶었죠. 대학을 거부하는 젊은이들 마음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은 기어이 대학을 그만두고 지금은 자기 일을 하면서 씩씩하게 사는 중입니다.”
그에 따르면, 대학을 거부할 수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돈을 거부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현실의 차별이 무척 심하다. 일류 대학을 나와서 일류 직장에 들어가면 초봉이 30년 교사 월급보다 많다. 이 일그러진 현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도 대학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가치가 분명하지 못하면, 아니 삶의 가치가 뚜렷하더라도 견디기 쉽지 않은 일이다. 자발적 가난에 연대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홀로는 이겨낼 수 없기에 같이 공부하고 같이 꿈꾸고 같이 살아간다. 모임이 지금껏 긴 세월 동안 엄혹한 현실 속에서도 독서공동체를 이루고 협동의 길을 촉진하려고 노력해 온 것은 여기에 한 술 밥을 보내기 위해서다. 젊은 회원들의 얼굴이 씩씩하고 환하다.
“나눌 먹거리를 챙겨오면 좋습니다. 개인 컵과 손수건, 장바구니를 챙겨 가지고 다니세요. 자신에겐 필요 없지만 남에게 필요할 수 있는 물건을 가져와 나누는 것도 좋아요.”
모임이 있을 때마다 공지 아래 붙은 말이 소박하고 아름답다. 모임은 지난 두 해간 풀무질 시절을 끝내고 내년부터는 다시 세상을 돌아다니며 책을 같이 읽을 예정이다. 이름이 없기에 모든 뜻있는 모임에 열려 있으니 이 모임에 과연 ‘도’가 있지 않을까. 내년부터 어떤 책 읽는 여정이 있을지 사뭇 기대된다.
장은수ㆍ출판평론가(순천향대 미디어콘텐츠학과 초빙교수)
◆삶과 앎을 하나로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책
많은 이들이 말로 외치는 바와 실제 살아가는 바를 일치시키려 애쓴다. 그런 이들을 위해 우선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 2008)을 권한다. 이 책은 외롭고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고 사랑하는 삶이 하느님으로 살아가는 일임을 깨닫게 해준다. 남북이 하나 되는 평화로운 세상, 온 세상 아이가 환하게 웃는 세상을 이루려고 애써온 저자의 삶을 떠올려보면 그의 글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될 것이다.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책읽는사회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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