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받은 의사 소견은 불인정
재감정도 보험사 거부 병원 안돼
울며 겨자먹기 합의 다반사
“나이롱 환자 악용 많아 불가피”
“사기 방지 빌미로 권리 침해”
가이드라인 표준화 목소리
평소에 병원 한 번 가지 않은 건강인도 사고로 허리를 다치면 기왕증(旣往症) 판정을 받는다. 척추는 20대 이후부터 노화에 따라 퇴행이 진행되는데 그마저 기왕증에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사고 시 기왕증 정도에 대한 판정도 의사마다 제각각이다. 고무줄 판정 시비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의사 소견도 제각각, 노화도 포함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경추골절로 사지마비 장애를 입은 한수인(65)씨는 실손보험사로부터 장애에서 기왕증이 유발한 기여도가 50%라며 보상액을 삭감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사고 이전부터 퇴행성 목 디스크가 척수를 압박하고 있었다는 의사 소견을 근거로 해서다. 하지만 한씨 측은 “보험계약 체결 당시 피보험자 나이와 성별에 따라 보험료를 차등 적용을 하는 이유가 뭐냐”며 “일반적인 수준의 노화를 기왕증으로 몰아 보험금을 깎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반발했다. 손해사정사 여경훈씨는 “어깨(회전근개 파열) 허리(추간판 탈출증) 무릎(슬관절 연골파열)이 기왕증 정도가 높게 나오는 부위로 의학적 판단이 일방적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보험사와 소비자 간에 분쟁이 많다”고 했다. 환자가 개인적으로 받은 의사소견은 인정하지 않고, 보험사 자문 의사의 경우에는 서류로만 환자 상태를 판정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병원과 의사 이름을 지운 터라 이의를 제기하기도 어렵다.
분쟁이 생기면 제3의 의료기관에서 재감정을 받을 수 있지만 이 역시 보험사가 거부하는 병원이나 의사는 지정할 수 없다. 보험사는 위촉한 자문의가 많고, 공개되지 않은 자문의 풀이 넓어 피보험자가 불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여씨는 “1억원 이상 고액 보험금은 일반인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만 1,000만원 미만의 경우 변호사 비용이나 시간 지연 등 이겨도 실익이 없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 울며 겨자 먹기로 합의한다”고 말했다.
택시기사 김영식(62)씨는 4년 전 영업 중 뒷차가 들이받는 사고로 무릎과 어깨를 다쳐 3주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등산이 취미일 정도로 건강했던 김씨는 무릎 관련 기왕증 판정을 80%나 받았다. 김씨는 “기왕증 판정이 너무 높게 나와 3주간의 휴업 손해도 받지 못했고, 800만원의 치료비 중 일부를 물어내야 할 상황이 됐다”며 “소송까지 가고 싶었지만 결과가 불확실해 울며 겨자 먹기로 보험사와 합의했다”고 억울해 했다.
손해 쌓이는 보험사도 골머리
보상액을 줄이기 위한 보험사의 손쉬운 수단으로 보이지만 기왕증 적용은 보험 남용이나 허위 진단을 잡아내기 위해 필요한 측면도 있다. 기왕증을 가장 늦게 약관에 명문화한 자동차보험의 경우 금융감독원은 일부 운전자들이 약관에 관련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과잉 치료를 받는 등 ‘나이롱 환자’가 많다는 이유를 들었다. 손해보험협회 관계자는 “가입자나 피해자가 질병을 숨기고 치료를 받는 경우 사실상 알기가 힘들다”며 “보험의 허점을 악용해 전체 손해율이 높아지면 선량한 가입자의 부담이 늘고 서비스도 악화할 수밖에 없는 만큼 기왕증은 반드시 따져 봐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실손의료보험 확대로 크고 작은 보험사기가 급증하고, 이에 비례해 보험사 손해율(수입 대비 지급률)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손보가 집계한 지난해 보험사기 적발 규모는 5,120억원, 전년보다 15.2%나 늘어났다. 보험사기 집계를 시작한 2001년 이후 사상 최대치다. 지난해 보험금 지급규모(24조원)의 2.1%에 불과하지만 업계는 적발되지 않은 건수도 많고, 일반인도 보험처리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어서 손해율이 늘고 있다고 했다.
보험사기 금액은 종류별로는 자동차보험이 50.2%(3,008억원)로 가장 많고, 장기손해보험(29.9%, 1,793억원), 보장성 생명보험(14.2%, 851억원) 순으로 많았다. 특히 실손의료보험을 포함한 장기손해보험은 전년대비 23.6%나 증가했다. 전체적으로 특히 과다입원이 급증했다. 실손의료보험이나 자동차보험을 막론하고 가입자의 도덕적 해이, 의사와 계약자가 결탁한 보험사기 행각이 만연해 있는 상황이기는 하다.
특히 3,000만명 이상이 가입해 제2의 국민건강보험으로 불릴 만큼 몸집이 큰 실손의료보험은 손해율 악화로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까지 나온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국내에서 영업하는 손해보험사 31곳 중 적자를 본 손보사가 9곳이나 됐다. 가입자가 낸 보험료 대비 지급된 보험금을 뜻하는 손해율은 지난해 9월 집계로 124.4%나 됐다.
하지만 급여 비용에 대해 병ㆍ의원을 대상으로 검증을 하는 건강보험과 달리 손해보험의 경우 의료비 검증시스템이 미비해 지출이 늘어나는 측면도 적지 않다. 병ㆍ의원이 과잉진료를 했을 때 치료비를 삭감할 방법이 사실상 없다. 더욱이 최근 감사원 감사결과 추간판 고주파열치료술 비용이 병원 별로 최소 20만원에서 최대 350만원까지 17.5배나 차이가 나는 등 비급여 진료비가 천차만별인 것으로 조사됐다.
보험사기 근절한다고 소비자 권리 침해해서야
보험사가 보험사기나 남용을 방지해야 하지만 이를 빌미로 정당하게 보상받아야 하는 권리가 침해돼서도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헌수 순천향대 금융보험학과 교수는 “손보사 자료를 따져 보니 손해율이 130% 정도까지 나오지만 가입자가 돌려받은 걸 계산해 보니 70%가 안 된다”며 미국 사례와 비교해도 소비자 혜택이 높은 게 아니라고 했다. 김 교수는 “보험사가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할 경우 소비자 손을 들어 주는 게 원칙”이라며 “보험금 누수 방지 명분으로 증거가 불충분한데도 적절한 보상을 하지 않으면 부정적 인식이 확산돼 도리어 보험회사에 손해가 된다”고 말했다. 때문에 표준화된 가이드라인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금융소비자연맹 교통사고피해자구호센터 오중근 본부장은 “보험사가 부적절한 이유로 과소 지급할 경우 별다른 제재조치가 없다”며 소비자 보호책이 더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 과소지급 건에 대해 금융감독원이 나서서 주의조치나 제재를 했지만 최근 들어 민원을 제기해도 보험사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민사소송으로 해결하라는 의례적인 답만 돌아온다는 것이다. 오 본부장은 “개인이 거대기업을 상대로 분쟁에 나서기는 어려운 만큼 정부 당국이 보다 적극적인 피해자 구제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지은기자 cj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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