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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용출 칼럼] 불안한 진보와 기회주의적 보수

입력
2015.11.08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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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가 민주화를 시행한지 거의 한 세대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정치의 두세력인 보수와 진보 양측 모두 국민들과 제대로 연계되어 있지 않다. 산업화 세력을 자처해 온 보수나 민주화 세력으로 치부해 온 진보 모두 새로운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구태연한 지역주의의 기반 위에 연명해온 탓이다. 그 결과 양측 모두 심각한 정당성 위기에 빠져 있다.

위기 상황은 진보 진영에서 시작되었다. 진보 진영의 위기는 시간은 걸렸으나 이미 태생적으로 예견된 것이었다. 원래 진보 진영은 민중이라는 이름 하에 일반 대중과의 연계를 주장하면서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러한 연계는 아주 취약한 것이었거나 거의 없었던 허구에 불과했다. 민주화 이후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 정립이 급해지자 결국 지역주의와 타협으로 끝났다. 이후 두 차례의 집권 경험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나 성남시의 청년 수당 사례에서 보듯 비전 제시에는 실패했다.

더욱이 민주화를 내세운 진보세력은 지리멸렬한 한국의 민주주의 상황에서 그 정당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국민들이 자신들의 실생활에 무익한 무차별적 지역주의에 대한 염증으로 진보 진영의 위기가 가속되면서 진보 세력의 불안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와 반대로 보수 진영은 산업화 추진 세력으로 폭넓은 지역적 지반과 세력을 확보하면서 상대적으로 안정적 기반을 즐겨왔다. 취약해지는 진보 세력과 지역적 안정성을 기반한 보수 역시 현실에 안주하는 안이한 자세를 보였다. 이런 자세는 국제적으로 급변하는 경제 상황에 대처하는 새로운 정치경제 모델 제시에 실패를 초래했다. 구태연한 안보의식과 새로운 사회 갈등 해소를 위한 대안 제시에 실패함으로써 보수는 진보의 퇴색을 이용하는 기회주의적 세력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걸핏하면 내세우는 색깔 논쟁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산업화 세력이 범한 가장 심각한 정치적 실패는 산업화 과정에서 습득한 고질적인 국가중심주의다. 모든 것을 국가가 주도했던 개발시대의 유산인 국가가 하는 대로 따라오면 된다는 목적론적 생각이다. 이는 역대 보수 정권의 공통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중심주의는 절차와 소통보다는 결과에 집착하게 한다. 세계화 속에서 불안한 국내경제 상황이 국민들에게 국가중심주의에 대한 향수를 자아내게 하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사고는 한국이 이제 더 이상 국가중심주의적 해결을 허용하지 않는 발전 단계에 있다는 것을 망각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최근 벌어지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은 바로 이러한 국가중심주의적 발상의 하나다. 국가가 교과서를 통한 애국심 함양과 정체성 확립에 최종 책임을 지고 해나가겠으니 따라 오라는 것이다. 한국 현실에 맞지 않는 비현실적 발상이다. 게다가 그 이면에는 기회주의적인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다.

우선 교과서 문제를 제기한 시점이다. 내년 4월 총선을 눈 앞에 두고 시작한 교과서 논쟁은 총선에서 승리해 여당과 정부의 정당성을 최종적으로 확정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여기에는 여당이 확보하고 있는 지역주의와 국가의존적인 산업화 세력의 고정적 지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계산이 단기적으로 성공할지 모른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절차적 정당성에만 의존하고 내용적 정당성을 상실한 한국 정치의 판도가 바뀌는 시작에 불과하다. 유승민 사태가 그 시작이고 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둘러싼 내부 분열 조짐이 그 좋은 예다. 이 두 사태는 계파의 문제라기보다 국가경영 체제와 이념에 관한 문제이며 민주주의 실천에 관한 가치 판단의 문제다. 이러한 내부 분화는 대내외 정치ㆍ경제 여건의 변화에서 오는 필연적인 것으로 기존의 낡은 정치의 한계를 노정하는 것이어서 일시적 봉합이나 외면을 통해 숨겨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득표를 통한 집권에만 몰두해온 한국 정치는 대내외의 구조적 변화로 더 이상 구태 정치를 지속할 수 없는 기로에 서 있다. 야당과 여당 모두 봉합된 분열이 끝내 분출하기 전에 재편성을 서둘러야 한다.

하용출 미국 워싱턴대 잭슨스쿨 한국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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