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 만물상] <28> 적정기술과 주가드 이노베이션
인도의 무저항주의자인 마하트마 간디가 물레를 사용해서 실을 뽑는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 개발된 방적기계를 사용한 대규모 공장이 인도의 도시 지역에 생긴 후 여기서 제조된 값싼 제품들이 농촌 직물 경제의 황폐화를 가져왔다. 이에 간디는 직접 물레를 사용하여 실을 뽑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농촌의 가내 직물업을 소생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외부 시장에 경제적으로 의존하다 보면 마을 공동체의 자립 경제가 매우 취약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디의 사상은 인도의 스와데시 전통에 기초를 두고 있다. 스와데시는 ‘모국’을 뜻하는 힌두어로 외부 시장에 대한 경제적 의존을 피하고자 하는 국산품 애용운동이다.
적정기술과 주가드 이노베이션
독일 출신의 영국 경제학자인 슈마허는 20년 이상 영국국립석탄협회의 선임경제학자와 유엔의 경제자문가로 일했다. 슈마허는 1955년부터 버마(현 미얀마)에서 유엔의 경제자문가로 일하면서 “경제학의 문제는 고정된 하나의 해결책을 갖지 않는데 그것은 인간의 문제이고, 오직 특정한 환경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버마에서 불교에 심취하고 간디의 스와데시 사상을 접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슈마허는 1965년 칠레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회의 연설, ‘옵저버’지 기고를 통해 선진국의 거대 기술을 개발도상국에 바로 도입하는 기술 원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중간(적정)기술의 도입을 대안으로 주장했다. 적정기술은 사용자의 필요, 저렴한 가격,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 사용 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본보 5월 11일자 23면 참조) 슈마허는 1973년 실시한 간디 추모 연설에서 간디를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간적인 경제학자”라고 말했다.
간디가 과학기술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최근 인도 기업의 혁신 사례를 연구한 프라할라드와 마쉘카는 2010년 7월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기고한 ‘이노베이션의 성배’라는 글에서 인도 기업의 혁신을 ‘간디식 이노베이션’이라고 명명했다. 인도식 혁신이 간디가 생전에 말한 두 가지 교리에 기초했기 때문인데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개발된 과학적 발명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과 ‘지구는 모든 사람의 필요(Need)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Greed)까지 채워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프라할라드와 마쉘커는 ‘적정한 가격(affordability)’을 통해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도록 하고 자원의 절제된 사용을 통해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디가 이미 60년 전에 지적했다고 주장하였다.
인도의 혁신을 ‘주가드(Jugaad) 이노베이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주가드는 ‘슬기로움' 또는 ‘즉흥적이고 대담하게 기발한 해결책을 고안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힌두어이다.
나비 라드주, 제이딥 프라부, 시몬 아후자가 2012년에 발표한 책 ‘주가드 이노베이션’에는 주가드 이노베이션 원리 6개가 제시되어 있다. ①역경에서 기회를 찾아라 ②적은 자원으로 많은 일을 하라 ③유연하게 사고하고 행동하라 ④단순하게 하라 ⑤소외계층을 포함하라 ⑥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다(본보 9월 5일자 11면 참조). ②번은 지속가능성 확보와, ⑤번은 적정한 가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와 같이 슈마허가 제안한 적정기술과 인도 사람들이 스스로 발전시킨 주가드 이노베이션은 모두 간디의 사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다만 주가드 이노베이션이 사고방식(mind set)과 기업가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유로 주가드 이노베이션은 적정기술 제품을 개발 및 보급할 때 지켜야 할 원칙으로도 활용 가능하다. 1981년 국제개발회사(IDE)를 설립한 적정기술의 대가 폴 폴락은 2013년에 발간한 저서 ‘소외된 90%를 위한 비즈니스’에서 개발도상국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적정기술 개발의 방법론으로서 ‘제로베이스 디자인’이란 개념을 제안하였다. “기존의 제품이나 생산 과정에 대한 일체의 선입견을 모두 지우고 아무 것도 없는 백지 상태에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디자인”을 의미한다. 폴락이 제안한 8개 원칙 중 하나가 ‘주가드를 실천하라’이다.
개도국 주민들 요구 반영한 발명들
‘주가드 이노베이션’에 소개된 사례를 살펴보자. 도예가인 만수크 프라자파티는 2001년 “마을 사람들이 사용하는 냉장고를 점토로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인도에서는 5억명이 넘는 사람들이 전기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는 몇 달 동안의 실험 끝에 미티쿨 냉장고를 발명해 50달러에 팔 수 있었다. ‘미티’는 흙을 의미하는 힌디어이다. 미티쿨은 윗부분의 용기에 물을 부으면 물이 점토로 된 벽면을 타고 흘러내려오면서 증발해 냉장고 안의 온도를 섭씨 8도까지 낮추는 구조다. 미티쿨은 나이지리아의 모하메드 바아바가 개발한 팟인팟 쿨러(일명 ‘항아리 속 항아리 냉장고’)와 유사한 원리로 성능은 더 좋다. 미티쿨 냉장고는 프라자파티의 도예 공장에서 처음으로 대량 생산된 제품이며 나아가 눌어 붙지 않는 프라이팬 같은 다른 점토 제품도 발명했다. 프라자파티의 프라이팬은 열을 더 오래 유지하면서 가격은 2달러에 불과하다. 그는 미국 경제지인 포브스에서 인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벤처 사업가로 선정됐다.
전기를 이용하는 저렴한 냉장고도 있다. 인도의 대기업인 고드레즈&보이스는 2009년 가격이 69달러에 불과한 초투쿨 냉장고를 출시하였다. 위에서 열고 닫는 이 냉장고는 컴프레서와 냉매를 사용하지 않는다. 기존의 냉장고가 200개의 부품을 사용하는데 비해 초투쿨은 10분의 1에 불과한 20개의 부품만 사용한다. 무게는 7.8㎏이며, 컴퓨터에 쓰이는 것과 유사한 냉각 칩과 팬으로 작동한다. 초투쿨이 소비하는 전력량은 기존 냉장고의 절반 수준이며, 고성능 단열재를 사용하므로 전력 공급 없이도 몇 시간 동안 냉장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지역에서도 건전지를 사용해서 작동 가능하다. 초투쿨은 마을 여성들과의 사용자 참여 디자인을 통해서 개발되었으며 미소금융기관의 회원들을 통해 보급되고 있다.
주가드 혁신을 한 자전거도 있다. 인도 동북부의 시골 마을에 사는 카낙 다스는 자전거를 이용해서 출퇴근을 했는데, 다스의 출근길은 구덩이와 둔덕으로 가득했다. 다스는 요통을 얻었고 출근 시간도 오래 걸렸다. 자신이 도로를 개선할 수는 없었기에 다스는 구덩이투성이 길에서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자전거를 만들기에 골몰했다. 결국 앞바퀴가 둔덕에 부딪힐 때마다 충격흡수장치가 압축되면서 동력을 뒷바퀴로 전달하도록 자전거를 개조했고 험한 길에서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다스의 자전거는 2002년 인도혁신재단으로부터 혁신대상을 수상했다. 매사추세츠공대(MIT)의 공학도들은 다스의 자전거에서 영감을 받아 자동차의 충격 흡수 장치에서 생산된 동력을 가속 장치로 전환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자동차산업, 의료보건 등으로 확산
인도의 엔지니어링 회사인 KPIT커민스인포시스템스는 2010년 플러그인 방식의 저가형 하이브리드 자동차 시스템인 레볼로를 출시했다. 레볼로 키트를 가솔린 자동차에 설치하면 연료 효율이 높은 고성능 하이브리드 자동차로 바꿀 수 있다. 충전식 배터리와 전동기, 도르래가 포함된 레볼로 키트는 정비공이 6시간 만에 대부분 기종의 자동차에 설치할 수 있다. 레볼로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도심 교통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데, 이는 브레이크가 작동할 때 발생한 운동에너지를 차후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저장해 두기 때문이다. 레볼로를 발명한 엔지니어 테자스 크샤트리아는 2008년 뭄바이에서 교통 체증에 갇혔을 때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레볼로가 연료 효율을 35% 이상 향상시키고, 온실가스 배출량을 30% 가까이 감축한다는 것이 실험 결과를 통해서 확인되었다. 레볼로의 가격은 1,300~3,250달러 정도로서 다른 하이브리드 자동차보다 80% 정도 저렴하다.
인도 타타그룹의 회장인 라탄 타타는 일가족을 전부 태우고 위험하게 도로를 주행하는 오토바이족을 위해 2,000달러면 구입 가능한 자동차 나노를 2009년에 출시하였다. 하지만 초기 판매량은 기대치를 훨씬 밑돌았다. 타타 측은 나노의 물류 네트워크를 간단하게 개조했다. 또한 농촌 고객들이 정장을 빼 입은 판매원에게 겁을 먹고 자동차 전시장을 찾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일상적인 환경의 전시장에 편한 복장을 한 직원들이 농민들과 차 한잔 마시면서 나노에 대해서 홍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비즈니스 모델을 수정하고 개선함으로써 타타자동차는 나노의 판매에 불씨를 지필 수 있었고, 그 후 판매 실적이 점차 증가했다.
인도에는 6,200만명의 당뇨병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 첸나이에 위치한 모한당뇨전문치료센터 원장인 모한 박사는 어느 날 “환자가 꼭 의사를 만나러 와야만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타밀나두의 외딴 마을 몇 곳에서 모바일 원격 의료 클리닉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도시의 의사들이 진료를 맡고, 농촌 기술자와 풀뿌리 보건 전문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 농촌기술자가 밴에 위성 연결이 진료장비들을 싣고 농촌지역을 돌아다니면 모한 박사와 동료 의사들은 첸나이의 진료실에서 모니터를 통해 환자와 소통하며 망막 검사를 하고 몇 초만에 검사 결과가 전송된다. 모한 박사는 인도 우주연구국과 파트너십을 통해 위성 통신도 무료로 사용한다.
사티야 제가나탄 박사는 남인도 농촌에 위치한 쳉갈파투 주립의과대학교의 소아과 의사다. 이 대학 병원의 유아사망률은 인도 전체 평균과 비슷한 1,000명당 39명 수준이다. 제가나탄 박사는 유아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처음에는 서구에서 제작된 인큐베이터를 수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설치비용이나 운영에 필요한 인건비, 유지보수비용이 매우 비쌌다. 이에 제가나탄 박사는 단순하고, 비싸지 않고, 사용하기 쉬운 인큐베이터를직접 제작하였다. 병원 근처에서 베어 온 나무로 상자를 만들고, 플라스틱으로 뚜껑을 설치한 다음, 100W 전구를 달아 체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단순한 디자인 덕분에 인큐베이터 제작 비용은 100달러에 불과했고, 유지보수도 쉬워졌다. 이 시제품을 병원에서 사용한 결과 유아사망률은 절반으로 감소했다. 현재 그는 미국의 레멀슨 재단의 지원으로 인도의 다른 농촌 지역 병원에 보급될 수 있도록 인큐베이터를 개량하고 있다.
전세계로 퍼지는 주가드 사고방식
이런 주가드 사고방식을 단지 인도의 혁신가 또는 기업들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가전제품 회사인 하이얼의 고객센터에 어느 날 쓰촨성의 외딴 마을 농민으로부터 세탁기의 배수관이 계속 막힌다는 민원 전화가 걸려왔다. 현장에 파견된 하이얼의 기술자는 그 농민이 막 수확한 감자의 흙을 씻는데 세탁기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하이얼은 “세탁기는 이런 목적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다”라고 대응하는 대신에 “세탁기를 사용해서 감자를 씻으려는 요구를 제품에 반영할 수 없을까?”라고 자문했다. 하이얼의 예상대로 중국 전역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세탁기로 감자를 세척했고 하이얼은 큰 배수관을 설치한 세탁기를 설계했다. 나아가 감자의 껍질을 벗기는 세탁기, 야크유를 버터로 만들어주는 세탁기, 세제 없이 옷을 빨 수 있는 세탁기 등을 연이어 출시했고 전 세계 세탁기 시장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주가드 이노베이션은 현재 전 세계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21세기는 자원과 소비자의 구매력이 지난 세기만큼 풍부하지 않은 결핍의 시대이다. 한국의 기업들도 적정한 가격과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혁신의 흐름에 동참하길 희망해 본다.
홍성욱ㆍ국립한밭대 적정기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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