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진정성 따지며 당국회담 회피
8ㆍ25 합의 동력 되살려 나가려면
체제인정과 공존 신호부터 보내야
8ㆍ25합의로 되살아났던 남북대화의 동력이 뒷심을 못 내고 있다. 한때 북측의 장거리 로켓발사와 핵실험 거론으로 우려됐던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성공리에 마쳤는데도 그렇다. 정부는 9월21일과 24일, 그리고 10월30일 등 모두 세 차례 8ㆍ25합의 핵심인 남북 당국회담 개최의사를 타진했는데 북측의 호응이 없다. 특히 세 번째 제안에는 “(상부에서) 아직 받으라는 지시가 없다”며 우리측의 통지문 접수마저 거부했다고 한다.
또 하나의 8ㆍ25 합의인 민간교류가 늘어난 건 그나마 다행이다. 10월 중에 개성 만월대 출토 유물전시회, 평양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 금강산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회의 등 남북공동행사 등으로 방북인원이 880여명에 이르렀다. 지난 2일엔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의원 전원이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조사 현장을 둘러봤다. 북측이 여야 소속을 가리지 않고 외통위원들의 방북을 허용한 것은 이례적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민간교류 확대가 남북관계의 질적 변화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8ㆍ25합의 당시 북측이 보여줬던 적극적 대화의지는 최근 급격히 시들해진 양상이다. 그런 기류는 9월21일 홍용표 통일부장관 명의로 보낸 당국회담 예비접촉 제안에 북측이 보인 반응에서 역력히 드러났다. 대북전단 살포, 북한인권법 제정 움직임, 북 도발설 확산 등과 관련해 통일부 당국자들이 남북대결 선동에 앞장서고 있다며 “예비접촉 제의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대북전단 살포와 북한인권법 제정 움직임 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새삼스럽게 이를 문제 삼아 진정성 타령을 하느냐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 북측이 원하는 금강산관광 재개나 5ㆍ24조치 해제 전망이 불투명해서 그렇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북측이 제기하는 ‘진정성’은 국면에 따른 속도조절용이 아닌 보다 근본문제라고 봐야 남북대화에 소극적으로 돌아선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북측이 보여달라는 남측의 진정성은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확실한 인정과 공존의 의지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북측에 보내지 않았다. 한반도신뢰프로세스나 드레스덴 구상도 이런 진정성에 기반한다는 믿음을 주지 못했다. 8ㆍ25합의 이후 전개된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외교 행보는 남북대화의 진정성에 대한 북측의 의구심을 한층 부추겼을 것이다.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이념 및 진영 갈등도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은 최근 통일준비위원회를 주재하면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주요 명분을 통일에 대비한 우리 체제 자긍심과 역사에 대한 가치관 확립에서 찾았다. 이게 선행되지 않으면 통일이 되기도 어렵고 통일이 되어도 “사상적으로 지배를 받게 되는 기막힌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아무리 남북신뢰구축과 교류협력을 외쳐도 그 기저에는 1970년대식 대결과 체제경쟁 의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확실하게 드러낸 셈이다.
남북대화 수준을 높이고 교류협력을 대폭 확대해도 자신들 체제가 흔들리거나 위협받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기 전까지 김정은 정권의 태도는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획기적인 관계 진전으로 이어질 남북당국 회담이 성사되려면 김정은 체제에 인정과 공존의지에 대한 우리 정부의 진정성을 분명하게 보여줘야만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게 없이는 민간교류가 좀 늘어나거나 어쩌다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리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익히 봐온 대로 작은 갈등에도 하루아침에 대결과 긴장 국면으로 되돌아 가버릴 수 있다.
박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이는 통일대박 실현을 앞당기려면 남북간 공존공생의 기반부터 넓혀가야 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국정화를 무리하게 밀어붙이며 오히려 그런 기반을 좁히고, 북한으로부터는 대화 제의의 진정성을 의심 받고 있다. 5년 단임 시계는 벌써 반을 훌쩍 넘겼다. 얼마 남지 않은 임기후반도 허망하게 흘려 보낼 생각인가.
/수석논설위원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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