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비 그 친 뒤 도심이 화려해졌다. 가로수, 도심 소공원, 아파트단지 녹지의 나무들이 저마다 총천연색 단풍을 뽐내고 있다. 설악산에서 시작한 올해 단풍이 하루 20㎞ 속도로 남하해 벌써 남쪽 지방으로 내려갔는데 서울은 우회해 간 듯하다. 산에는 단풍나무 종류 외에는 거의 낙엽이 졌을 텐데 서울 도심에는 은행나무, 느티나무, 벚나무 등의 단풍이 이제야 절정이다. 도시 열섬 효과로 상대적으로 기온이 높은 탓일 것이다.
올해 단풍은 가뭄 영향으로 예년 같지 않다고 했지만 가을 비 치고는 꽤 많은 양이 내려서인지 단풍 든 잎들이 한층 산뜻해 보인다. 빌딩 숲 사이로 알록달록 울긋불긋 소공원 단풍 든 풍경도 멋지다. 어디에 저렇게 아름다운 색깔들을 숨겨놓았다가 마지막 잔치를 벌이는 걸까.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 가장 아름답게, 가장 화려하게 마지막을 장식하는 모습이 눈물 겹기까지 하다.
단풍 들고 잎을 떨구는 것은 나무들의 겨울 나기 준비과정이다. 기온이 떨어지는 것을 감지한 나무들은 줄기와 잎 사이 조직에서 생장호르몬인 옥신 분비를 중단한다. 그러면 ‘떨켜’라는 단층이 생겨 물관과 체관이 닫힌다. 더 이상 잎으로 수분과 영양분 공급이 안 되고 반대로 잎에서 생성된 탄수화물도 줄기 쪽으로 이동하지 않고 잎에 머물게 된다. 이 과정서 엽록소가 파괴되고 광합성을 보조하던 여러 성분들이 제 색깔을 띠어 단풍이 드는 것이다. 잎에 카로틴 성분이 많으면 황적색을 띠고, 크산토필이 풍부하면 은행잎처럼 샛노란색, 안토시아닌 성분이 많으면 붉은 색조의 단풍이 든다. 이 때 잎에 당분이 많이 남아 있으면 더욱 선명한 단풍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티 하나 없이 샛노란 은행나무 단풍은 숨이 턱 막힐 정도다. 아무리 바라봐도 싫증이 안 난다. 빗물에 먼지가 씻겨서인지 올해 도심 은행나무 단풍은 유난히 샛노랗다. 연하게 녹색 기운이 남아있는 순간이 더욱 아름답다. 순금의 색깔이다. 은행 열매 냄새가 고약스럽지만 바로 이런 아름다움 때문에 은행나무는 여전히 가로수로 사랑을 받고 있다.
심을 때 암수를 구별해 수 나무 중심으로 심으면 좋지만 어린 묘목 상태에서 암수 구별이 어렵다. DNA검사로 가릴 수 있지만 묘목을 일일이 검사하려면 그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크게 자란 은행 암나무 한 그루를 교체하려면 1백만원 가량의 비용이 들어 그것도 쉽지 않다. 은행나무 열매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것은 씨앗을 잘 보존하려는 자기보호 전략이다. 그 냄새 때문에 병해충이 얼씬도 못한다. 저 오랜 중생대 시기부터 수 억년을 생존해온 비밀이 여기에 있다. 열매 냄새가 싫다고만 할 게 아니라 은행나무의 생존 지혜로 여기고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느티나무는 노란색과 주황색 두 종류로 물 든다. 거목으로 자라 웅장한 수형을 형성한 느티나무 전체가 단풍이 든 모습은 장관이다. 특히 주황색계열의 단풍은 고아한 기품이 느껴진다. 벚나무도 노란색과 주황색 두 종류로 단풍이 든다. 벚나무 잎을 주어 들고 들여다 보면 꿀샘의 흔적이 보인다. 잎자루 윗부분에 있는 두 개의 꿀샘에서 꿀이 흘러나와 이슬처럼 맺히면 개미가 찾아온다. 그 개미는 꿀을 얻는 대신 다른 해충이 찾아오는 것을 막아준다. 꿀을 주고 보디가드를 고용하는 셈이다.
최근 들어 도심 조경수로 각광을 받고 있는 핀오크 나무도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있다. 미 북동부 저지대가 고향인 이 참나무는 붉은 색조 단풍으로 유명하다. 손기정 선수가 1936년 8월 베를린 하계 올림픽 마라톤 우승 후 부상으로 받아 모교인 양정고등학교 교정에 심은 나무가 바로 이 핀오크다. 이런 스토리를 살려 명명 과정이 불투명한 대왕참나무나라는 명칭 대신 손기정 참나무로 부르자는 게 필자의 오랜 주장이다.
핀오크를 조경수로 본격 들여온 것은 1980년대 중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로수로 많이 심고 도심 소공원, 아파트 단지 녹지, 골프장에도 조경수로 많이 심고 있어 이제는 참나무 수종 가운데 우리 일상 주변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나무가 되었다. 요즘에는 도토리가 떨어진다. 핀오크 나무 주위를 잘 살펴보면 흑갈색의 동글동글한 도토리를 발견할 수 있다.
산딸나무, 산수유, 감나무 그리고 덩굴식물인 담쟁이 등도 붉은 색조의 단풍이 아름답다. 요즘 산딸나무는 딸기 모양의 열매는 다 떨어지거나 말라 쭈그러들었는데 단풍이 불타오르듯 붉다. 친척관계인 산수유 잎도 비슷하게 물드는데, 잎 사이로 길쭉길쭉한 붉은 열매들도 앙증맞게 예쁘다. 감나무는 주렁주렁 매달린 감에 먼저 시선이 가지만 새빨갛게 물드는 단풍도 아름답다. 젊은 시절 은행나무 잎과 함께 책갈피에 많이 끼워 넣던 기억이 난다.
팽나무는 노랗게 물든다. 은행나무만큼은 노랗지는 않지만 은은한 노란색이 나름의 멋을 풍긴다. 남쪽 해안이나 도서 지방에 많은 팽나무가 최근 정원수로 인기를 끌면서 서울 지역 아파트 단지 등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에 의해 고향 땅을 떠나온 실향목들이다. 요즘 특별히 팽나무 노란 단풍에 눈길이 가는 것은 세월호 사건 때문이다. 팽나무가 많아서 팽목리였고, 이곳의 항구가 팽목항이다. 팽나무 노란 단풍은 팽목항에, 그리고 도시 곳곳에 휘날리던 노란 리본을 떠올리게 한다. 1년 반밖에 안 지났는데 벌서 아득한 옛일처럼 느껴진다. 망각이 무섭다. 12일은 대입 수능일이다. 그날의 비극만 아니었더라면 단원고 2학년이던 그들도 치렀을 수능이다. 유가족들은 또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을까.
화단 가에 많이 심는 화살나무는 초가을에 일찍 단풍 들고도 늦가을까지 적자색 단풍을 달고 있다. 이른 봄 가장 먼저 연두색 새싹을 내미는데 여린 잎을 나물로도 많이 먹고 겨우내 굶주린 동물에게 신선한 먹거리가 된다. 그래서 화살나무는 어린 잎을 보호하기 위해 화살 깃 같은 날개를 만든다. 코르크 성분으로 돼 있는 이 날개는 동물들이 잎을 뜯어먹지 못하게 하는 장치다. 동물들의 키가 닿지 않을 정도로 화살나무가 훌쩍 크면 더 이상 날개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메타세콰이어는 침엽수에 가깝지만 밝은 적갈색으로 단풍이 든다. 줄지어 선 큰 키의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은은하게 물들어 가는 모습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상한 기품이 느껴진다. 이 나무도 은행나무처럼 중생대 시기부터 생존해온 살아있는 화석이다.
가로수로 많이 심는 플라타너스는 좀 게으르게 단풍이 든다. 아직도 새파란 잎이 더 많다. 사실은 게으른 게 아니라 생장력이 워낙 왕성해서 기온이 많이 떨어진 늦가을까지도 떨켜를 만들지 않고 활발하게 탄소동화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흰 눈이 펄펄 내리는 초겨울까지도 푸른 잎을 달고 있는 것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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