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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주의 유유자적] 이런 소풍날

입력
2015.11.13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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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짜기 중에서도 구불구불 한 참 올라와 외진 곳이라, 같은 면에 속한 이들에게도 “ 무섭지 않아요?” 혹은 “어떻게 이런 구석진 데를 알고 찾아 들어 왔어요” 소리를 종종 듣는다. 졸지에 촌사람에게도 촌사람 소리를 듣는 순간이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그렇듯 사람이 살고 있는 터는 당사자에게 어떤 사연이 있거나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기 마련이다.

내겐 피치 못할 사연보다는 비어있던 빈 집이 형편에 맞고, 배산임수는 아니라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뒷산과 넓게 트인 앞산 능선의 물결들이 이곳에 별 고민 없이 보따리를 풀어놓게 했다. 그게 고마워서였을까? 뒷산과 먼 능선은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색색으로 조화로운 풍경의 향연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물들었던 붉은 잎들은 바람에 화르르 떨어져 작은 마당에 카펫을 깔아주고 나중 물든 잎들은 허공에 사각이며 자기에게 남은 시간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시인이 자신의 시집에 적은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시를 옮기는 사람일 뿐이다”. 내가 바라보는 저 단풍의 시작과 끝도 많은 말을 하면서 나고 지는 것일 진대 어리석은 나는 내가 듣고 보고 싶은 것만을 지식과 지혜의 기준으로 삼아 자기를 자꾸 조급한 소인배로 만들어 가는지 모르겠다.

앞마당에 해바라기가 있다. 봄에 씨를 얻어 꽃이나 보려 심은 것이 외줄 대궁으로 비바람을 견디며 노란 꽃을 피우고 검은 접시 혹은 부푼 보리빵 같은 얼굴에 씨를 가득 채우고 발 밑을 바라보고 있다. 말라비틀어져 축 늘어진 갈색 잎들은 찬바람이 불면 파르르 몸을 떤다. 내겐 그것이 마치 입에 건초를 물고 겨울이 오는 초원을 향해 갈기를 한 번 흔드는 야생마처럼 쓸쓸하기도 하고 강인해 보이기도 했다. 식물의 생명력에서 잠복해있는 동물의 역동성을 발견하는 것이 기이하며 놀라운 순간이었다. 낫을 들어 저 목을 쳐 몇 됫박의 씨를 얻을까 하던 생각을 버리기로 한다. 스스로 나고 소멸해가는 해바라기의 시간을 지켜보는 것으로 올해의 더 큰 이득을 삼기로 한다.

전혀 다른 방향에서 어제 잠시 망설였던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갔다.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편지봉투를 꺼냈다. 거기에는 삼십만 원이 들어있다. 사과를 따준 오일 치 품삯이다. 어제 세어봤던 돈을 다시 한 번 세어보고 십만 원을 빼서 봉투에 담았다. 그것을 주머니에 찔러놓고 과수원집 반장님네로 천천히 걸어갔다. 반장님은 사과 창고에 따로 분리해둔 흠집 난 사과를 차에 싣고 있다. 가을에 사과를 수확하면 약간 얼룩이 지거나 따다가 떨어뜨려 흠집이 생기는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을 분리해서 청량산 주차장으로 가서 파는 것이다.

나는 봉투를 반장님께 내밀었다. “제가 하루에 담배 한 보루 값만 쳐달라고 했잖아요. 두 보루 값을 쳐서 계산했네요.” 한사코 내젓는 팔을 뿌리치고 주머니에 넣어드렸다. 나는 경험도 없는 초보 일꾼이다. 설령 같은 시간을 한다고 해도 내 일손은 더디고 실수도 많았다. 그런데 몇 십 년을 한 가지 일을 해온 이들과 같은 돈을 받는다는 것이 조금은 양심에 꺼렸다. 그리고 반장님은 위아래 붙어사는 유일한 이웃 아닌가. 깨를 심는 시기를 일러주고 약을 치는 법을 가르쳐주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묵묵히 일하는 농부의 모습을 가르쳐주지 않았는가.

장사를 하러 출발하는 반장님 차에 더펄 올라탔다. 도착한 주차장에는 벌써 인근 마을 농부들이 콩이나 팥, 들깨 그리고 사과 등 이것저것 잡곡들을 펼쳐놓고 늦단풍 구경 나온 관광객들과 웃기도 하고 실랑이도 벌이면서 흥정을 하고 있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우리는, 아니 나는 괜히 마음이 급해져서 사과 상자를 내리고 맛보기를 깎아놓고 마치 내 사과 팔러 온 것처럼 들떴다. 그러나 금방 선글라스 아줌마들에게 기죽어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나앉아서 농부이며 일일 장사꾼인 아마추어들의 흥정놀이를 지켜보면서 혼자 즐거웠다.

슬몃 바라본 청량산 늦단풍이 아름답고 사과 한 봉지씩 들고 깔깔거리며 관광차로 돌아가는 이들의 모습도, 전대도 없이 주머니에 불쑥불쑥 지전을 구겨 넣는 시골 댁의 그을린 웃음도 아름답다.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모를 이 산속에도 이런 소풍날이 있다.

정용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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