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품격
차용구 지음
책세상 발행ㆍ488쪽ㆍ2만3,000원
한국의 중세, 고려시대도 그렇지만 서양의 중세는 오늘의 한국인에게 더욱 낯설다. 서양 중세사를 연구하는 한국인 학자도 많지 않다. 신간 ‘남자의 품격’이 눈에 띄는 첫 번째 이유는 희소성이다. 더군다나 ‘남성사’ 연구다. 여성사나 여성성을 다룬 책은 드물지 않지만 남성성에 대한 집중 분석은 국내외 어디든 찾기 어렵다. 그 중에도 남자다움의 이상형으로 통하는 중세의 기사는 어떤 사회적 문화적 맥락과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연구다. 서양중세사를 전공하고 중세의 권력 구조 속 여성과 남성의 역학관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차용구 중앙대 교수가 썼다.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 중세 기사의 낭만적인 무용담과 로맨스는문학과 영화 등으로 잘 알려진 편이지만, 중세 귀족 남자가 기사로 성장하고 살아가는 과정의 구체적 모습을 한국인의 저술로 만나기는 이 책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1190년대 프랑스 플랑드르 인근의 한 성직자가 쓴 ‘긴느 백작 가문사’의 중심 인물인 아르눌 백작의 일생을 통해 그가 어떻게 남자다운 남자, 기사로 만들어졌는지 살펴보는 역사서다. 아르눌은 전쟁을 불사하는 앙숙이던 긴느와 아르드르, 두 귀족 가문이 정치적 화해를 위해 택한 정략결혼으로 태어났다.
그 시대 귀족 가문의 장남들이 그러했듯 그는 기사 수업을 받았다. 유모와 어머니 품에서 자라다 일곱 살 때 집을 떠나 아버지가 섬기던 플랑드르 백작의 성으로 가서 동년배 귀족 사내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엄격한 훈련를 받았다. 무예를 익히고 신체를 단련하고 교양을 쌓고 예의범절을 닦았다. 기사의 시동으로 기사를 따라다니며 여러 해를 보낸 뒤 스무 살 때 일종의 성년식인 기사 서임식을 하면서 공식 인정을 받았다.
‘긴느 가문 백작사’는 아르눌의 선조와 아르눌 사후 가문의 종말까지 기록한 족보이면서 당시 사회적 문화적 풍경과 더불어 귀족의 일상을 시시콜콜 기록하고 있어 흥미진진하다. 이 오래된 문헌을 바탕으로 쓴 ‘남자의 품격’ 또한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출생부터 노년까지 아르눌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유년 시절, 성장과 교육, 출세, 연애, 결혼, 전쟁 등 그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장면들을 빠짐없이 전한다. 덕분에 어렴풋하게만 짐작하던 중세와 중세 기사의 삶이 바짝 다가오는 느낌이다.
여자 그리고 남자는 생물학적 성이지만, 여자다움이나 남자다움은 역사적ㆍ문화적 산물이어서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중세 유럽에서는 남자다움의 원형을 대변하는 것이 기사였다. 저자는 귀족 소년이 기사 수업을 받고 기사의 명예와 의무를 다하며 비로소 ‘진짜’ 남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상술한다.
중세 초기에 남자다움은 곧 힘으로 통했다. 이민족의 침입과 카롤링거 왕조의 붕괴에 따른 혼란 속에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이라, 남자는 거친 전사라야 했다. 1096년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면서 전사로서 기사는 중세의 지배층으로 성장하지만, 교양 따위는 없었다. 중세 유럽을 지배한 교회가 십자군전쟁 중 살인과 폭력에 관대했던 것도 작용했다. 이처럼 폭력적인 남성성이 뒤집히는 변곡점은 12세기다. 유럽이 안정기에 접어들고 농업생산성과 교역이 성장하면서 문예부흥이 따르자 남성적 강인함과 세련된 교양을 겸비하는 게 기사의 덕목이 된 것이다. 약자와 여성을 보호하는 기사도를 칭송하고 기품있는 궁정문화와 기사문학이 발달한 것도 이때다.
이 책에서 특히 재미있는 대목은 귀족 소년들의 기사 수업, 기사들의 스포츠인 마상경기, 그리고 심지어 아내와도 경쟁하면서 자기과시적인 남성성을 갖추고 유지하는 분투다. 남자들의 세계인 기사 집단은 특별한 우정과 연대로 중세의 정치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마상경기는 갑옷과 투구, 무기를 갖추고 하는 모의전투로, 승리하면 상금으로 한밑천 잡을 수 있는 데다 부유하고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할 기회이기도 해서 늘 성황을 이뤘다. 아르눌의 아내가 남편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구금까지 당한 이야기는 이채롭다. 아내의 가문과 아르눌의 가문이 1214년 부빈전투에서 서로 적으로 대결했을 때 아내가 친정 편에서 독자 행동을 하자 구금해버렸는데, 친정 쪽에서 군대가 와서 구출했다. 이후 부부는 4년간 별거하다가 다시 정치적으로 화해했다. 중세 귀족들의 정략결혼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흔히 중세는 남성중심적 가부장제 사회여서 여자는 늘 수동적이었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음을 시사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아르눌을 비롯한 기사들도 남자다운 남자가 돼야 한다는 정신적 부담을 견뎌야 했고, 가장으로서 귀족으로서 행세하는 데 필요한 재력을 갖추는 것도 짐이었다. 중세는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 사회였지만, 소수 엘리트 남성이 아니면 남자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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