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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성과 계급의 혁명적 건강성을 믿었다

입력
2015.11.14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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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로절린 벅샌덜

로절린 벅샌덜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개척자 중 한 명이었다. 공산주의 이념을 모태신앙처럼 내장한 그는 반자본주의 투쟁과 결합하지 않는 여성해방운동은 넌센스라 여겼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파도와 남성권력의 굳은 관성에 동시에 맞서면서 그는 21세기 여성운동의 길 하나를 여는 데 기여했다. The Murphy Institute.
로절린 벅샌덜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개척자 중 한 명이었다. 공산주의 이념을 모태신앙처럼 내장한 그는 반자본주의 투쟁과 결합하지 않는 여성해방운동은 넌센스라 여겼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파도와 남성권력의 굳은 관성에 동시에 맞서면서 그는 21세기 여성운동의 길 하나를 여는 데 기여했다. The Murphy Institute.

로절린 벅샌덜(Rosalyn Baxandall)은 1939년 6월 12일 코민테른 상근 활동가였던 한 공산주의자(Lewis M.Fraad)의 세 딸 중 맏딸로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그는 10대의 대부분을, 미국 역사 교과서가 제2차 적색공포(Red Scare)시대라 부르는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빨갱이의 딸’로 보내야 했다.(제1차 적색공포시대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기인 1917~20년.)

벅샌덜 같은 이들을 미국서는 ‘레드 다이퍼스(Red Diapers 빨간 기저귀들)’라 부른다. 그러니 월러스타인이 세계혁명의 해라고 칭한 1968년 전후의 해방공간에서, 레드 다이퍼스들이 방방 뛴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또 상상만으로도 신나는 일이다. 한편에서는 반(反)도덕ㆍ성해방의 자유가, 다른 한편에서는 인권과 공동체적 정의의 함성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던 때였다. 벅샌덜은, 필립 로스가 근작 ‘죽어가는 짐승’에서 쓴 표현을 빌자면 ‘쾌락의 세포(전자)’가 아니라 ‘정치의 세포(후자)’였다. 그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활동가였다.

1996년 주디 캐플란(Judy Kaplan) 등이 펴낸 ‘Red Dipers: Growing up in the Communist Left’라는 책은 46명의 레드 다이퍼스들이 유ㆍ청년기의 체험을 엮은 에세이다. 거기 벅샌덜의 글 ‘부르주아지의 빨갱이 자매들 Red Sisters of the Bourgeoisie’은 “(유년의 기억에서) 아버지의 기벽과 거기서 비롯된 성장환경을 공산당의 영향과 구분하기란 어렵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소아과 의사였던 아버지 루이스 프라드는 29년 입당한 공산당원으로 30년대 초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코민테른 본부에서 일했다. 그는 스탈린주의자였다. 자녀들이 자본주의에 물들까 봐 집에 TV와 라디오를 없앴고, 만화책도 ‘소비에트식’검열을 거친 뒤에야 허락했다고 한다. 햄버거 같은 정크 푸드는 물론이고, 콜라도 니켈 캔디(동전모양 사탕)도 금지식품이었다. 감시가 두려워 공산당이나 공산주의 같은 단어는 집에서도 금기어였지만, 어른들끼리 어울리는 자리에서 들려오는 ‘자본가 쓰레기들(bourgeoisie crap)’같은 말들은 뜻도 모른 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했다. “부모님은 내가 고등학생이 돼서야 축음기를 사주셨는데 베토벤 이전 클래식 음악만 들어야 했고, 대중음악도 피트 시거나 폴 롭슨 같은 좌파 가수들의 노래만 허락을 받고 들을 수 있었다.” 변호사였던 어머니(Irma London) 역시 공산당원이었다. 어머니는 벅샌덜이 태어나면서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매카시즘 시대는 더 험했다. 여름방학 때마다 가족 단위로 움막을 함께 빌려 집단 생활을 하던 당원 아저씨들이 자고 나면 연행돼 사라지던 시절. “당시 우리 집에서 가장 더러운 범죄는 ‘고자질’이었다. 막내가 이웃집 채소밭을 망친 사실을 이웃에게 일러바쳤다가 엄청나게 혼이 난 적이 있다. 부모님은 내게 ‘끄나풀(stool pigeon)’이라며 호통을 쳤다.” 10대의 벅샌덜을 짓누른 것은 이중의 권력이었다. 그는 자본주의와 국가ㆍ사회 권력에는 맞서야 했고 가부장 권력에는 철저히 순응해야 했다. 그의 우울한 글에서 그나마 유쾌한 대목은 아버지를 만나려고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던 FBI 요원들에게 탐폰을 집어 던지던 일, FBI가 도청하는 전화기에 일부러 저질스러운 말들을 내뱉곤 하던 일을 언급한 대목이다. “그 시절 ‘레드 다이퍼스’는 용감했다”고 그는 썼다.

그의 아버지는 57년 탈당했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비밀연설 이듬해였다. 물론 탈당이 전향은 아니었다. 병원을 연 그는 가난한 노동자계층과 블랙리스트에 오른 동지의 자녀들을 무료로 진료했고, 왕진 가서는 생활비를 보태주고 왔고, 쿠바 의료용품 지원 기금 모금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우리는 아버지가 추구한 가치나 정치관 등을 공유했다. (…)그는 기성의 권위와 언론, 정부의 공식 발표-설사 그것이 스탈린의 과오에 관한 것이어도-는 믿지 말라고 가르쳤다. 목사나 자본가는 범죄자였고, 자유주의자들의 선정(善政)도 의심의 대상이었다. 오직 중요한 것은 근면한 노동과 이웃과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었다. 우리는 ‘스타하노프(Stakhabovite)’였다.” 슬럼가 페인트 칠하기, 거리 청소, 세입자 권리 찾기 동조시위, 해군기지 앞 핵잠수함 반대 피켓시위 등이 10대 여고생 ‘스타하노프’가 가담한 일의 일부였다.

50년대 말 그는 위스콘신대학 메디슨에 진학, 불문학을 전공한다. 그로선 부모로부터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비로소 독립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었다. 마르크스주의 미학자이자 극비평가였던 남편(Lee Baxandall)을 만난 것도 대학 시절. 둘은 61년 결혼해 유럽 등지를 여행하며 막 태동하던 신좌파(New Left)의 지적 양분을 마음껏 들이켠다. 63년 콜럼비아대에서 사회복지학으로 석사학위를 딴 뒤 그는 ‘청소년을 위한 동원(Mobilization for Youth)’에 취직, 연구원 겸 활동가로 일한다. ‘동원’은 뉴욕 로이스트사이드(Low East Side) 빈민가 청소년들을 돕는 복지기관으로 61년 설립돼 가난 구제와 청소년 비행 계도, 취업 교육 등을 주관하던 곳이다.

계급ㆍ인종 평등과 정의 같은 공동체적 가치는 혈통의 유산이었지만 개인의 자유와 성 평등은, 그로선 결핍감에서 비롯된 더 전투적인 갈망이었을지 모른다. 67년 그는 로빈 모건(Robin Morgan) 캐롤 해니쉬(Carol Hanisch) 등과 함께 페미니즘 2세대 운동의 중추 가운데 하나인 ‘뉴욕의 급진 여성들 New York Radical Women’이란 단체의 창립멤버로서 본격적인 페미니즘 운동에 투신한다. 좌파조직 내 고질적인 성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페미니즘 운동과 여성학이 독립하던 시기였다.

1968년 NYRW의 미스아메리카 반대 시위. 회원들은 애틀란틱시티 컨벤션센터 광장에서 거들과 브레지어를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는 퍼포먼스로 억압에 대한 해방의, 인상 깊은 은유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훗날 파이어스톤은 “속옷을 태우지는 않았다”고, “언론이 우리를 브라 버너스가 아니라 거들 버너스라고 불러줬다면 더 큰 호응을 얻었을 것”이라고 농담했다. www.redstockings.org
1968년 NYRW의 미스아메리카 반대 시위. 회원들은 애틀란틱시티 컨벤션센터 광장에서 거들과 브레지어를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는 퍼포먼스로 억압에 대한 해방의, 인상 깊은 은유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훗날 파이어스톤은 “속옷을 태우지는 않았다”고, “언론이 우리를 브라 버너스가 아니라 거들 버너스라고 불러줬다면 더 큰 호응을 얻었을 것”이라고 농담했다. www.redstockings.org

NYRW는 68년 주간 공동육아센터 ‘보육 해방 Liberation Nursery’을 설립, 큰 호응을 얻었다. 벅샌덜이 첫 아들을 낳은 직후였다. NYRW 회원들은 그 해 애틀란틱시티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장 광장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면서 송아지와 양들에게 왕관을 씌우고, 브래지어와 거들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는 퍼포먼스를 벌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입장권을 사서 행사장에 들어간 회원들은 행사 막판에 “No More Miss America!”같은 구호를 외치며 ‘여성 해방(Women’s Liberation)’이란 문구를 적은 플래카드를 발코니 난간에 내걸기도 했다. 언론은 그들을 ‘브라 버너스(Bra burners)’라 불렀다.

조직은 노선 갈등으로 69년 해체됐고, 벅샌덜은 모건 등과 함께 ‘위치 WITCHㆍ Women's International Terrorist Conspiracy from Hell’를 만든다. ‘위치’는 성차별의 공적ㆍ구조적인 문제를 중시해 정치적 투쟁에 주안점을 둔 반면,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s Firestone) 등이 만든 ‘레드 스타킹스 Red Stockings’는 ‘새로운 가정(new home)’을 표방하며 성차별의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문제 개선을 중시했다. 두 조직은 사안에 따라 연대하기도 했다.

위치의 활동 중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69년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결혼 박람회(Bridal Fair)’저지 집회였다. 검은 베일을 뒤집어 쓰고 사슬을 몸에 감은 회원들이 행사장에 난입해 ‘매춘부 양산업자에게 맞서자(Confront the Whoremakers)’ 같은 제목의 팸플릿을 나눠주며 결혼제도를 비판ㆍ조롱한 거였다. 경찰이 들이닥치자 그들은 미리 준비한 흰쥐를 풀어 행사를 ‘신나게’ 망쳐놓았지만, 지나치게 과격한 주장과 방법으로 조직 내에서 이견과 반성이 일기도 했다.

69년의 ‘낙태 공개발언(Abortion Speakout)’은 레드 스타킹스가 주도한 행사였다. 뉴욕 워싱턴스퀘어 저드슨 메모리얼 교회 앞 광장에 약 300명의 여성들이 모였다. 참석자들은 시민들 앞에서 도시 뒷골목의 불결한 낙태 시술소 침대에 누워야 했던 아찔한 경험과 임신-출산 후 아이를 입양 보낸 체험담을 공개 증언했다. 낙태는 당연히 불법이었고, 가장 완강하게 반대하던 이들이 교회 성직자들이었다. 그들의 용기 있는 도발로 이후 미국 전역에서는 유사한 행사들이 들불처럼 이어졌고, 73년 연방대법원의 낙태 허용 판결(Roe v.s Wade 판결)을 앞당기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 행사의 첫 발언자가 벅샌덜이었다.(wordsofchoice.blogspot.kr)

60년대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불씨는 아무래도 J.F 케네디가 암살된 1963년 베티 프리던의 책 ‘여성의 신비’가 지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케네디 집권 초기 전미여성위원회(NOW)의 성차별 폭로, 고용평등 운동도 든든한 화약고였다. 다만 사회주의 페미니스트가 보기에는 개량적이고 온순했다. 초기 신좌파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성차별 문제를 자본주의의 역사와 노동 현실 속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열었고, 특히 60년대 광범위하게 전개되던 인권ㆍ저항운동 조직 내 성차별에 가장 뜨겁게 분노함으로써 독자적인 운동의 장을 열게 했다. 공산주의 이념을 모태신앙처럼 내장한 페미니스트 벅샌덜에게 반자본주의 투쟁과 결합하지 않는 여성해방운동은 넌센스였다. 10대 때부터 이어온 경험에 비춰 좌파운동 진영 내의 성평등 의식이라는 게 어떤 지경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98년 출간된 ‘페미니스트 회고 기획 The Feminist Memoir Project’에 실은 ‘불 지피기 Catching the Fire’라는 제목의 에세이에 그는 “페미니즘이란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사랑에 빠지듯 여성운동에 매료됐고, 페미니즘은 내 생애의 퍼즐을 풀어주었다. 나는 민권운동 반전운동 등등을 해왔지만, 내게 그것들은 의무감과 분노의 소산이었지 내 자신의 싸움은 아니었다”고 썼다. 유년의 아버지로 표상되는 것들에 대한 애증을 그는 그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인종과 계급과 젠더의 구조를 교차시켜 보고자 했다. 사회 변혁은 급진적인 제도개혁을 통해 교정돼가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했다.”(jaconbinmag.com, 2015.10.19)

하지만 그의 급진적 페미니즘은 여성학과 여성운동사에 미친 영향에 비해 운동진영 내에서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1971년 이후 그는 뉴욕주립대(SUNY) 교수가 돼 미국학(여성노동운동사)을 가르치며 여성운동 현장과 거리를 뒀다. 대신 급진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가치를 추구하며 독자적인 삶을 개척해나갔다. 그는 76년 린다 고든(Linda Gordon), 수잔 리버비(Susan Reverby) 등과 함께‘미국 노동 여성들: 1600년 이후 지금까지의 기록사(America’s Working Women: A Documentary History, 1600 to the Present)’라는 전 6권의 방대한 자료집을 공동 출판했다. 370여 년 간 여성들이 남긴 일기와 구술기록 편지 노래 시와 사료집, 대중잡지 기사까지 수집해 여성들이 노동으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고 어떤 조직을 만들어 어떻게 일했는지, 노예 여성들이 들에서 집안에서 했던 일과 사보타지 사례까지 집대성한 저 책은 여성학과 노동학에 중요한 1차 자료로 꼽힌다. 당시 랜덤하우스의 젊은 편집자가 토니 모리슨이었다.(NYT, 15.10.14) 벅샌덜 등은 95년 인종ㆍ민족적 배경과 지역 변수를 포함시킨 개정판을 냈고, 앞서 87년에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의 조직가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Elizabeth Gurley Flynn,1890~1964)의 평전 ‘Words on Fire’를 내기도 했다. 플린은 IWW의 주요 활동가로 조직내 성 차별과 중앙집중적 구조 등에 대해 선구적으로 문제 제기하며 싸운 공산주의자였지만, 벅샌덜의 평전이 나오기 전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여성이었다.

2011년 은퇴 후에는 뉴욕시립대에서 노동학을, 베이뷰 여성 마약 경범죄 교정시설에서 수감자들을 교육했다. 2011년 말 한 인터뷰에서 그는 경범죄 교정시설이 수감자(대부분 18~34세 스페니시와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고 했다)들의 교정ㆍ재활을 돕기보다 그들을 사회의 낙오자로 만들고 있다고 성토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학생들은 지식에 목말라 있”고 “정치적인 문제에 아주 성실하다. 그들은 어서 나가서 ‘월가 점령(Occupy Wall Street)’시위에 참여하길 원하고, 뭔가 이 사회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는 이들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여성과 계급의 혁명적 건강성을 믿고 미래를 낙관한 힘찬 사회주의자였다. 올 초 신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그는 그 길로 퇴원, 친구들을 초대해 성대한 고별 파티를 열고 10월 13일 별세했다. 향년 76세.

시카고의 좌파 출판사 헤이마켓북스는 그를 추모하며 ‘Rest In Power’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벅샌덜의 트위터 사진.
시카고의 좌파 출판사 헤이마켓북스는 그를 추모하며 ‘Rest In Power’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벅샌덜의 트위터 사진.

영국의 저명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이자 왕립학회 회원인 샤일라 로보덤(Sheila Rowbotham)은 가디언 부고에서 “벅샌덜은 어디를 가든 선동하고 조직했다. 또 어디서든 환영 받고, 사랑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사람을 이해하고, 서로를 이어주고, 또 가르치고, 돕고, 아이디어를 나누는 데 쏟았다”고 썼다. 시카고의 비영리 좌파 정치시사 전문 출판사 ‘헤이마켓북스(Haymarket Books)는 추모의 관용구 R.I.P(Rest In Peace) 대신 “Rest In Power”라는 멋진 표현으로 로절린 벅샌덜의 삶과 죽음을 함께 기렸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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