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히만은 유대인 대학살의 책임자였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조사해 보니 그는 성장 과정도 지극히 평범했고 공무원 생활도 성실했고, 조직의 질서에 충실하며 준법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이웃에서 흔히 만나는 아저씨와 같은 사람이었다. (물론 이 객관적 평가로 인해 유대인 사회에서 아렌트는 지탄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왜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까? 아렌트는 그가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을 인식하지 못한 채 악을 자행한 경우라고 결론 내렸다. 자신에게 맡겨진 유대인 대학살이 어떤 의미와 결과를 불러오는지를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유의 형식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조직의 논리와 명령을 성실하게 따르는, 준법과 성실의 사명을 다했을 뿐이다. 아이히만은 세상에서 가장 근본적인 죄, ‘사유하지 않은 죄’를 범한 것이다.”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법인 지음, 불광출판사, 47쪽)
모두가 제 말이 진리라고 고함치는 시대. 각자도생의 구호가 범람하는 세계. 우리는 올바른 사유의 실마리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의 저자 법인 스님이 소개하는 석가모니의 답은 이렇다. “설령 내가 말했다고 해서 진리라고 결정짓지 말라. 나의 말도 의심하고 헤아려 보아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세월호 이준석 선장에게 살인 혐의를 적용, 무기징역을 선고한 가을. 법인 스님의 책을 편다. 선장의 죄목은 극히 무겁되 간단하다. 무엇이 옳은지 철저하게 무관심했던 것. 무엇을 해야 마땅할지 전혀 사유하지 않은 것.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에 대한 사법적 단죄는 이제 시작됐으나, 진실규명 작업이 제자리 걸음인 점은 진실규명의 책임자들 역시 무사유와 무관심의 죄를 나날이 더해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누가 사유하지 않은 죄를 부추기는가. 세월호 진상규명 대신 공연한 색깔공세에 힘을 쏟는 이는 누구인가. 정직한 판단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헛된 욕망을 폐기’하라는 법인 스님의 경고가 묵직하다.
“무엇보다도 헛된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욕망이 눈을 가리면 정직한 판단이 흐려지고 무지가 욕망을 충동질하여 또 다른 욕망을 낳게 만든다. 다음은 연민과 자애의 눈으로 세상을 정직하게 바라보라. 그 다음은 끊임없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의 말과 삶에 편견 없이 귀 기울이는 성찰을 해야 한다. 이미 그대들도 알고 있다. ‘묻지 않으면 진리가 내게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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