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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패션… 나는 죄책감 없이 모피를 입는다

입력
2015.11.2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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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R FREE FUR’(모피 없는 모피) 레이블을 선보인 스텔라 매카트니는 동물보호라는 윤리를 패션의 가장 럭셔리한 욕망으로 승화시킨 대표적 디자이너다. 스텔라 매카트니 제공
‘FUR FREE FUR’(모피 없는 모피) 레이블을 선보인 스텔라 매카트니는 동물보호라는 윤리를 패션의 가장 럭셔리한 욕망으로 승화시킨 대표적 디자이너다. 스텔라 매카트니 제공

중견기업 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싱글여성 김모(39)씨는 최근 모피를 끊었다. 화려하고 패셔너블한 옷차림으로 업계에 이름난 그는 대학시절부터 모피를 즐겨 입은 마니아. 모피 특유의 고급스럽고 세련된 느낌이 그의 크고 분명한 이목구비와 잘 어울리는 편이라 스스로 “미쳤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모피를 애호해왔다. 대학선배나 직장동료들이 “복부인 같다”고 한 마디씩 할 때도 아랑곳하지 않고, “패션은 자유의지에 의한 자기표현”이라며 반발했다. 곳곳에서 발호하는 ‘패션경찰’들 앞에서도 단호했던 그가 자발적으로 모피를 끊게 된 건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면서부터. “요즘처럼 날씨가 추운 날에는 고양이들을 끌어안고 자요. 저한테는 자식이나 다름없는 애들이고, 품고 있으면 얼마나 뜨듯한지 몰라요. 그런데 모피란 게 동물 거죽을 통째로 둘러쓰고 다니는 거잖아요. 불현듯 이건 진짜 못할 짓이다 싶더라고요.” 그는 더 이상 입지 않는 모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푸시버튼의 박승건 디자이너가 모피종식을 선언한 '퍼 이즈 오버' 코트. 푸시버튼 제공
푸시버튼의 박승건 디자이너가 모피종식을 선언한 '퍼 이즈 오버' 코트. 푸시버튼 제공

수많은 연예인들을 팬으로 거느린 스타 디자이너 박승건씨는 자신의 브랜드 푸시버튼에 모피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인조모피는 싸구려라고 생각해 리얼 퍼를 고집해온 그였지만, 반려견 푸시를 키우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매일같이 푸시를 보고, 같이 자고, 만지다 보니 리얼 퍼의 동물학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어요. 용기가 없어서 모피 제작 동영상은 직접 못 봤지만, 그 비윤리성에 대해서는 잘 알게 됐죠. 고민고민 하다가 2011년 가을/겨울 컬렉션에 ‘FUR IS OVER’라는 제목으로 인조모피를 선보였고, 그 이후 리얼 퍼는 절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대중의 인식도 상당히 변화한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예전에는 인조모피라고 하면 후드 끝에만 붙어 있어도 싸구려로 받아들였잖아요. 하지만 요즘은 인조모피도 디자인과 컬러가 좋으면 주저 없이 선택하는 것 같아요. 확실히 패션의 영역으로 들어온 거죠.”

모피 욕망과 동물 사랑 사이에서 사람들은 흔들린다. 게티이미지뱅크
모피 욕망과 동물 사랑 사이에서 사람들은 흔들린다. 게티이미지뱅크

비건 패션, 새로운 럭셔리가 되다

비건은 채식주의자 중에서도 우유나 달걀까지 먹지 않는 가장 엄격한 채식주의자를 일컫는다. 채식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동물보호론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둘 사이에 밀접한 친연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은 채식인구가 18세 이상 성인 인구의 8분의 1을 차지하며, 이중 3분의 2는 동물보호를 이유로 채식을 한다. 그렇다면 패션에서도 이 윤리원칙이 적용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인조 모피나 인조 가죽, 인조 스웨이드는 진짜가 너무 비싸 어쩔 수 없이 써야 하는 싸구려 대체재였으나, 과학 기술의 급속한 발달에 힘입어 진짜와 거의 구분할 수 없는 고급 인조 소재들이 최근 대거 출현했다. 부드러움, 재질의 외관, 방한효과 등에서 실제 모피에 거의 육박한 이 가짜 모피들은 럭셔리 브랜드의 경우 몇 백 만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가짜를 뜻하는 프랑스어 ‘faux’를 붙여 ‘포 퍼’, 또는 ‘페이크 퍼’라고 불려온 인조모피가 수도 없는 동그라미가 그려진 가격표를 달고 있을 때, ‘가짜’라는 이름은 과연 온당한 걸까. 언어는 세계를 규정하므로, 페이크 퍼가 비건 퍼(vegan fur), 에코 퍼(eco fur), 펀 퍼(fun fur) 등으로 급격히 대체되고 있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미국 비건 패션 브랜드 보트(비건+오트)쿠튀르의 창립자인 린 힐가트는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밀레니엄세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점점 더 스스로를 양심적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고, 음식 다음은 패션이 될 것”이라며 “많은 소비자들이 비건이라는 말을 환경과 동물을 걱정하는 수준 높은 계층과 동일한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고품격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말인데, 패션이 이런 ‘고급진’ 개념을 그냥 놔둘 리가 없다.

최근 가장 핫한 인조모피 코트 브랜드 쉬림프. 쉬림프 2015 가을/겨울 룩북
최근 가장 핫한 인조모피 코트 브랜드 쉬림프. 쉬림프 2015 가을/겨울 룩북

모피를 사랑하는 동물보호론자를 위하여

비건 패션을 럭셔리의 반석에 올려놓은 일등공신은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다. 그가 이번 겨울 선보인 ‘FUR FREE FUR’(모피 없는 모피) 레이블은 새로운 하이 패션으로서 인조모피의 위상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패션계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라블레의 동명소설 속 거인 가르강튀아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이 오버사이즈 코트가 단지 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패셔너블하고 럭셔리해서다.

그 자신 채식주의자인 매카트니는 합성 스웨이드나 가죽은 오래 전부터 사용해왔지만 인조모피와는 꽤 오래 거리를 둬 왔던 디자이너. 며칠 전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매카트니는 “끌로에 2001년 가을/겨울 컬렉션 등 인조모피를 많이 쓰던 시절도 있었으나, 그게 타당하고 필요한 일인지 의심스러웠다. 진짜 모피처럼 보이는 가짜 모피 때문에 내가 진짜 모피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소비를 촉진하는 게 아닌지 두려웠다”고 말했다. 그가 인조모피로 돌아오기 위해 고안한 방법은 옷의 바깥에 ‘FUR FREE FUR’라는 큼지막한 레이블을 붙여 누가 봐도 진짜 모피가 아님을 알 수 있도록 식별가능성을 높인 것. 옷 위에 인장처럼 찍은 ‘FUR FREE FUR’ 레이블은 이 코트가 모피가 아닌 섬유로 만들었음을 단번에 주지시킴으로써 비건 패션의 윤리 반경을 넓혔다.

비건 패션을 얘기하려면 2013년 등장한 영국 인조모피 브랜드 쉬림프를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 100만원 안팎의 고가인 이 브랜드의 인조모피 코트는 통통 튀는 색깔과 세련된 디자인으로 전 세계 패셔니스타들을 매혹하며 단숨에 세계적 럭셔리 브랜드로 부상했다. 쉬림프를 탄생시킨 젊은 디자이너 한나 웨일랜드는 인조모피가 거의 모든 측면에서 진짜 모피의 수준에 도달했는데, 왜 진짜 모피를 입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포 퍼가 럭셔리 제품이 아니라는 건 잘못된 생각이죠. 이제 진짜 모피에 대한 비판은 점점 더 강해질 수밖에 없어요.”

국내에서는 푸시버튼 외에도 제인송, 길트프리(guilt free) 등이 대표적인 비건 패션 브랜드다. 채식주의자가 어느 선까지 동물성식품을 먹지 않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나뉘는 것처럼 비건 패션도 가죽, 울, 모피, 깃털 등 소재 사용의 범위를 어디까지 국한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푸시버튼 박승건 디자이너는 “일단 큰 범위에서 모피는 절대 쓰지 않는다”며 “그 외 가죽, 스웨이드 등의 소재는 식용으로 도축된 것만 쓰는 식으로 선택적으로 사용한다”고 말했다.

밍크 느낌을 낸 구호의 페이크 퍼 코트. 삼성물산패션 제공
밍크 느낌을 낸 구호의 페이크 퍼 코트. 삼성물산패션 제공

윤리가 패션의 욕망이 될 때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죄악이므로 윤리의 준칙을 어디까지 적용할 것이냐 하는 논쟁은 결국 비아냥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거위털 패딩은 입으면서 모피는 왜 반대하냐는 비판은 모피를 포기하기까지의 험난한 내적 도정을 모멸하는 처사일 수 있다. 알몸시위를 불사하는 동물보호단체의 비판과 비난에 공감하면서도 모피의 아름다움을 포기하라는 압박을 패션 자경단의 폭력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적어도 모피에 대해서는 모종의 윤리적 합의가 이루어가고 있다는 것, 그것을 경하하는 게 보다 발전적이고 민주적인 태도다.

생명존중의 인조모피가 그러나 환경보호의 측면에서 ‘그린 소재’인 건 아니다. 아크릴을 주소재로 하는 인조모피나, 플라스틱이나 섬유를 코팅해 만드는 인조가죽 모두 제작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화학제품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인조모피는 석탄, 석유 등 재생불능 에너지가 리얼 퍼의 세 배 이상 들어가며, 폐기 후 이내 썩는 리얼 퍼와 달리 생분해되기까지도 수백 년의 시일이 걸린다. 리얼 퍼에 비해 훨씬 노동집약적이고 작업공정도 복잡하다. 동물은 보호할지언정 환경을 파괴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인함 없는 패션(cruelty-free fasion)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LF의 여성 편집형 리테일 브랜드 앳코너는 이번 시즌 인조모피 제품군 물량을 전년 대비 10배나 늘렸다. 삼성물산패션의 대표적 브랜드 구호에서도 페이크 퍼와 양피 무스탕 느낌을 내는 캐주얼한 인조 코트 아이템들을 선보였다. 구호의 김현정 디자인실장은 “동물보호나 착한 소비는 확실히 트렌드가 됐다”며 “올해 특히 페이크 퍼가 주목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연예인들은 모피코트 입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인조모피니 오해하지 마시길”이라는 말을 꼭 적는다. 동물학대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급격히 고조되고 있는 탓이다. “경제학이 아닌 윤리학을 이유로 선택된 합성 모피와 가죽 덕분에 패션 시장이 새로운 붐업을 맞고 있다”는 인디펜던트의 진단처럼, 패션산업은 이제 윤리를 새로운 욕망상품으로 판매하고 있다. 패션이 파는 것이 언제인들 그저 예쁜 옷이나 가방, 신발이었던가. 패션은 늘 욕망을 판매해왔다. 윤리적이고자 하는 욕망, 이제는 그것이 상품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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