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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실명제·IMF…김영삼의 공(功)과 과(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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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실명제·IMF…김영삼의 공(功)과 과(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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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2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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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향년 88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숨을 거뒀다.

정부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기로 했으며, 장례는 26일까지 5일장으로 정해졌다. 영결식은 26일 오후 2시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된다. 안장식은 영결식 종료 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엄수된다.

▲ 22일 오후 경남 거제시 장목면 대계마을 김영삼 전 대통령 기록전시관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조문객들이 헌화 후 묵념하고 있다. (사진제공=연합뉴스)

'최연소·최다선 국회의원', '첫 문민 대통령' 등의 화려한 수식어를 뒤로 하고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은 경제정책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난다.

김영삼 정부는 금융실명제와 부동산 실명거래 등 경제개혁 정책을 펴고, 대외적으로는 적극적 시장개방을 시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그러나 임기 말 한보철강과 기아자동차 등 대기업의 연이은 도산 등 곳곳에서 켜진 '경제 적신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맞은 것은 뼈아픈 실책으로 기록됐다.

▲ 공(功): 금융실명제로 과세투명성 확보

김 전 대통령은 "변화와 개혁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로 경제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런 의지를 바탕으로 금융·부동산의 양대 실명제를 이룩해 우리 경제의 투명성을 높였다.

김영삼 정부는 집권 초기 80%가 넘는 높은 지지율을 업고 금융·부동산실명제를 도입하며 지하·음성거래를 양성화하고 검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금융실명제는 김 전 대통령의 취임 첫해인 1993년 8월 12일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 발동을 통해 전격 시행됐다. 가명과 차명을 쓴 금융거래가 각종 비리·부패 사건의 원인이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던 차였다.

김영삼 정부의 경제개혁 정책은 부동산 거래 실명제로 이어졌다. 금융실명제법 도입으로 부동산에 자금이 쏠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자 투기를 막으려고 1995년 1월 6일 부동산 실명제 실시 계획이 발표됐다. 입법 절차는 3주 만에 신속하게 이뤄졌다.

김영삼 정부는 규제개혁에도 나섰다. 기업창업·공장입지, 자금조달, 시장진입 관련 행정 절차가 크게 간소화됐다.

대외적으로는 임기 전반기 빠른 경제 성장과 적극적 시장개방을 바탕으로 1996년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점도 업적으로 꼽힌다. 정부 차원에서 OECD 가입을 역점 사업으로 정하고 가입 협상을 벌여 성사시킨 일이었다.

▲ 과(過): 급속한 시장개방으로 맞은 외환위기

김영삼 정부는 OECD 가입으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는 국민적 자부심을 높이며 규제개혁에 나섰지만 이를 계기로 위기를 겪었다.

1997년 1월 재계 14위인 한보그룹 계열사인 한보철강 부도로 대기업 연쇄 부도 사태를 맞았고, 같은 해 4월 삼미그룹의 부도, 7월 기아자동차 도산 사태가 터졌다. 쌍방울그룹, 해태그룹이 위기를 맞았고 고려증권, 한라그룹이 차례로 쓰러졌다.

1997년 한 해 동안 부도를 낸 대기업의 금융권 여신만 30조원을 훌쩍 넘어서면서 나타난 신용 경색과 금융시장 혼란은 한국을 금융위기로 몰아갔다.

해외 금융기관의 부채 상환 요구에 외환보유액이 바닥이 나자 김영삼 정부는 1997년 11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해 모라토리엄(대외채무 지불유예) 선언을 가까스로 면했다.

OECD 가입으로 예상되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충분한 사전 준비를 하지 못하면서 급속하게 시장개방과 자본 유출입을 허용해 IMF 구제금융 사태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참으로 송구스러울 뿐"이라며 난국 타개에 힘을 합쳐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재임 5년간 경제부총리를 6번이나 바꿔 일관성 있는 경제정책이 수립·집행되지 못했고, 무리하게 시장개방 정책을 추진하다가 외환위기를 맞은 점 역시 김 전 대통령의 과(過)로 지적된다.

▲ 재계총수와의 각별한 인연

▲ 1996년 8월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이건희 삼성 회장을 만나는 모습. (사진제공=연합뉴스)

경제 분야에서 교차하는 공과 과 외에도 김 전 대통령의 대통령 재임 시절 재계 총수들과 맺었던 각별한 인연에도 눈길이 쏠린다.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사면·복권을 활용해 재벌 총수에게 기업인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을 다시 열어주기도 했는가 하면 때로는 특정 발언이나 정치적 입지 때문에 불편한 관계를 한동안 유지하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은 김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 첫 번째 사면·복권을 받았다.

이 회장은 지난 1996년 8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노 전 대통령에게 직무와 관련해 4회에 걸쳐 100억원을 전달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면서 서울지법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듬해인 1997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개천절을 맞아 이 회장 등 경제인 23명을 특별 사면·복권했다.

김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초기에 당시 현대그룹은 큰 수난을 겪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지난 1993년 비자금 조성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정 명예회장이 기소된 것은 한 해 전인 제14대 대선에 출마해 여당 후보였던 김 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운 데 따른 일종의 보복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나돌았다.

대선 패배 직후인 지난 1993년 1월 정 명예회장은 출국금지를 당한 데 이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그 직후 의원직을 포기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해야만 했다.

정 명예회장은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사면복권됐다.

김서연 기자 brainysy@spor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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