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바뀔 때 마다 투병 중이신 김영삼 대통령의 건강에 항상 마음이 쓰이더니 끝내 88세를 일기로 이렇게 가셨습니다. 돌아가시고 나매 당신은 한국 현대정치사에 빛나는 큰 별이셨고 이 나라 민주주의 큰 산이셨음을 보다 절절이 느끼고 깨닫게 됩니다.
이 나라 정치사에서 제1대 사건을 1948년의 정부수립이라고 한다면 그에 버금가는 일은 93년 2월 25일, 30여 년에 걸친 군사정치문화를 청산하고 이 땅에 문민민주정부를 세운 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정치가 공동체 구성원에게 희망을 접목시켜주는 일이라면, 군사독재의 폭압아래서 당신은 국민으로 하여금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유일한 정치지도자이자 예언자이셨습니다. 유신독재의 저 암흑 속에서 당신은 “닭의 목은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는 말과 “새벽은 그것을 찾아나서는 사람에게만 온다”는 말씀으로 우리 민주동지들을 격려하고 이끄셨습니다.
10ㆍ26사태로 서울이 봄이 오는 듯싶다가 5ㆍ17군사쿠데타로 또다시 80년대의 암흑이 찾아왔을 때도 민주주의의 새벽을 연 것은 당신이셨습니다. 83년 5월 18일, 생명을 건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하셨을 때 저는 간디의 비폭력투쟁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존중하는 영국정부를 상대로 했었기에 가능했지만, 전두환 군사독재는 인간을 생각하는 그런 문명적인 정부가 아니라고 간곡히 만류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이 생명 바쳐도 여한이 없겠노라 강행하셨고, 그것이 마침내 2ㆍ12총선 신화를 거쳐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장정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대도무문(大道無門), 그렇습니다. 민주주의와 정의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 문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은 글씨로, 몸으로 스스로 보여주셨습니다.
유신말기 의원직 제명을 당하셨을 때 “한번 살기 위해 영원한 죽음을 선택하기보다는 한번 죽더라도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하겠노라” 하셨을 때의 그 의연함이 부마항쟁을 불러왔고, 그것이 마침내 10ㆍ26사태로 이어졌습니다. 과연 당신은 용기의 정치인이셨습니다.
93년 2월 25일 제14대 대통령 취임사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렇게도 애타게 바라던 문민 민주주의 시대를 열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로부터 우리 대한민국이 산업화에 이어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로 세계 속에 우뚝 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 한국인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한국과 한국인은 이제 존경과 찬탄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은 변화 속의 개혁을 전광석화처럼 이루어냈습니다. 취임 첫날의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개방, 사흘 만에 단행한 재산공개, 7일만에 이루어진 청와대주변의 안가 철거와 정치자금 사절, 3월 8일에 있었던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의 경질 등에 이어 하나회 척결, 그 해 여름의 금융실명제 실시로 이어졌습니다.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실시는 사실 문민 명예혁명이라 할 만한 역사적 쾌거라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직대통령 두 사람을 법정에 세움으로써 취임사에서 “이 땅에 다시는 정치적 밤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한 약속을 마무리 했습니다. 뒷날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할 수 있는 길도 이렇게 하여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임기 중에 지방자치를 전면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이 나라 민주주의를 절차적으로 또 제도적으로 완결하였습니다.
63년 대학교 선배님으로 처음 뵙고 71년 홀로 전국의 시장과 학교를 돌며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지원 유세하시는 것을 보고 비서로 입문해 모시고 배운지 어언 반 백년이 가깝습니다. 이제 김영삼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면서 저는 하늘이 무너지는 아득한 심사와 함께 대통령께서 이 땅에서 이루어 놓으신 것들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태산같은 걱정이 앞을 가립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보여주신 그 불퇴전의 용기와 대도무문의 정신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고자 마음을 다 잡고 있습니다. 짧지 않은 생애이셨지만 파란으로 점철된 이승에의 삶을 벗어나 이제 분열과 갈등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잠드소서.
김덕룡 민주화추진협의회 이사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