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12월 2일 미국 상원이 공화당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에 대한 불신임을 의결했다. 민주당 의원 44명 전원과 공화당 의원 절반(22명), 유일한 무소속이던 오리건 주 웨인 모스 의원이 매카시의 의정 활동이 부적절하다는 데 동의, 67대 22로 매카시 불신임안이 통과됐다.
안건은 매카시의 의회와 의원들에 대한 지속적인 모독과 모욕, 자금 유용 의혹 등이었지만, 그 직전 매카시가 미 육군 뉴저지 킬머캠프 지휘관 랄프 즈비커(Ralph Zwicker) 준장을 공산주의자로 지목한 것이 계기였다. 50년 2월 웨스트버지니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나는 국무부 내 공산주의자 205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이래 공무원, 연예인, 교사, 부두노동자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확산되던 그의 빨갱이 사냥이 군대로 향하기 시작한 거였다.
군인 출신인 아이젠하워 당시 대통령은 매카시의 군에 대한 모욕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 결정적으로 등을 돌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 54년 3월 CBS의 시사프로그램 ‘See It Now’가 매카시의 주장들을 개별적으로 추적해 대부분 근거가 없는 주장임을 폭로해 상당한 반향을 얻은 터였다. 즈비커의 혐의를 확인하기 위해 54년 4월 열린 상원 청문회에서도 매카시는 단 한 건의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고, 변호사들의 논박에 일방적으로 밀렸다. 미국 시민들은 비로소 믿어온 진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대세에 밀려, 또 매카시에게 밉보여 피해를 입을까 봐 두려워 4년 넘게 끌려 다니던 의회가, 특히 상원이 불신임안을 상정할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다.
그 와중에도 매카시는 왓킨스 청문회를 “공산당의 골 빈 시녀(unwitting handmaiden of the Communist Party)”라며 조롱했고, 표결 뒤에는 “이제 서커스가 끝나 다시 공산주의 뿌리뽑기에 매진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기자회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급격히 시들었고, 2년여 뒤인 57년 5월 간경변으로 숨졌다. 향년 48세.
매카시의 죽음이 매카시즘의 끝은 아니었다. 그가 뿌린 불신과 음모의 씨앗은 끈질기게 살아, 그의 비미(非美)활동위원회는 이미 기소됐거나 소환된 이들에 대한 조사ㆍ심리를 1975년까지 지속했다. 위원회 해산이 매카시즘의 끝도 아니었다. 그 광기는, 매카시가 그러했듯이, 이념보다는 출세나 정치적 영향력 같은 사욕에 기생하며 강한 전염성을 보인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