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이야기ㆍ자연 어우러진 트레킹코스
화려하진 않지만 담백함이 매력
말 그대로 모티(‘모퉁이’의 경상도 사투리)를 돌고 도는 길이다. 산을 올라 땀이 쫙 빠지는 것도 아닌데 곧지 않은 길을 찬찬히 걷다 보면 어느새 성난 마음이 한 김 빠진다. 모퉁이를 돌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길이 펼쳐지는 것이 어쩐지 인생사를 닮았다. 유명세를 떨치는 걷는 길은 아니지만 옛이야기와 아름다운 자연이 소박하게 어우러진다. 그 담백함에 반해 이 길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경북 김천시 일원에는 다양한 모티길이 있다.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 황점리를 잇는 ‘인현왕후길(9㎞)’ ‘수도녹색숲모티길(15㎞)’과 대항면 운수리, 향천리의 ‘사명대사길(4.3㎞)’‘직지문화모티길(4.5㎞)’등 4개가 대표적이다. 직지사 수도암 청암사 등 역사자원과 자연이 함께하는 문화가 있는 트레킹 코스이기도 하다.
직지사 등 사적지에 과하주도 유명
수백만 그루 나무 속 야생동물 보고
체력부담도 적어 사색하기 좋아
직지문화모티길과 사명대사길은 직지사 주변 길이다. 직지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해 직지저수지 방면으로 가면 직지문화모티길이고, 직지사 쪽이 사명대사길이다. 관광지다 보니 인현왕후길이나 수도녹색숲모티길에 비해 관광객이 많아 볼거리가 많고 편의시설이 가까이 있다.
직지문화모티길은 시내를 따라 작은 마을들을 지나 직지저수지를 만나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길에 접어들기 전 김천 특산물인 과하주 제조장이 있다. 과하주는 무형문화재 경북 제 11호로 이 술을 빚는 송강호씨는 국가지정 식품명인 제17호다. 남산동에 있는 과하천이란 우물의 물로 빚은 술을 과하주라 불렀다. 과하천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맛보고는 그 샘물 맛이 중국에 있는 과하천 물과 꼭 같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과하주는 궁중 공물로 진상했을 만큼 유명세를 얻었으며 조선 초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그 인기가 계속됐다. 김천이라는 지명도 과하주의 명성이 높아 돈을 많이 벌었으므로, ‘금(金)이 솟아나온다’는 샘이란 뜻의 ‘금천(金泉)’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직지문화모티길이 술맛을 상상하며 물가를 걷는 길이라면 사명대사길은 사명대사의 족적을 따라가는 호국 기행이다. 외국작가들의 조형물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는 직지문화공원을 지나 길을 따라 올라가면 직지사 입구와 매표소가 보인다. 1,600년 역사를 간직한 고찰은 천년 묵은 칡나무와 싸리나무로 한 기둥씩 만들었다는 일주문을 넘어 그 기운을 뿜어낸다. 맞은 편의 김천세계도자기박물관과 백수문학관도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후 황악산으로 들어서면 사명대사에 한 걸음 더 가까워 진다. 옛길을 그대로 두어 사명대사 족적을 따라가는 두근거림이 더 크다. 꿩 등 야생동물을 볼 수도 있다. 마을 뒷산에 오른 것처럼 편안하고 날 것 그대로의 매력이 있다. 하지만 이런 스토리텔링 정보가 없다면 밋밋한 등산로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사명대사길과 직지문화모티길이 만나는 쉼터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2km만 걸으면 출발점으로 되돌아 간다. 여유롭게 걷길 원한다면 직진하여 직지문화모티길로 들어가 돌아 나오는 것을 추천한다.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에서 황점리(원황점)까지 15㎞구간에 조성된 수도녹색숲모티길은 아름다운 경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코스다. 수도산(1,327m) 단지봉(1,327m) 좌일곡령(1,258m) 목통령(1,010m)를 잇는 길로 해발 평균 1,000m의 길을 굽이굽이 넘어간다. 자작나무 숲과 3ha에 달하는 국내 최대규모 낙엽송 보존림이 코스에 속한다.
낙엽송 보존림은 일제강점기 조림사업의 산물이다. 서글픈 과거와 달리 울창한 숲은 방문객을 푸근하게 껴안는다. 낙엽송 보존림으로 들어가면 벤치가 놓여있는 데 잠시 앉아 숲의 치유효과를 느껴보는 것도 좋다. 하늘을 가리는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지금 내 어깨의 짐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껴질 지도 모른다.
마지막 지점인 황점리 원황점 마을은 온통 산으로 에워싸인 오지여서 고즈넉한 정취가 풍긴다. 황점리는 조선시대 황을 캐던 곳이다. 마을 이름도 ‘원래 황을 캐던 곳’이란 뜻을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조림이 이뤄진 곳으로 유명하다. 전나무 낙엽송 오동나무 등 수백만 그루의 나무가 조성되어 있으니 그야 말로 녹색 숲이다. 수도리 마을도 김천 시내서 차로 한 시간은 더 들어가야 하는 외지지만 황점리 마을은 꼭꼭 숨어서 외지인이 차로 가는 것 조차 쉽지 않다. 모티길과 달리 산세가 험한 원황점 넘어 황점리 마을을 좀 더 둘러보면 순박한 오지마을 라이프가 느껴진다. 집 앞 돌담마다 감나무가 있고 어김없이 까치밥이 남아있다. 겨울을 맞이하는 감나무 앙상한 가지에 달린 감들은 붉은 등이 켜진 것처럼 눈에 박힌다. 지금은 인적이 드문 산 중턱에는 천하대장군 장승이 우뚝 솟아 여전히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그 앞을 흐르는 무명계곡에는 돌탑이 소복하다.
4시간 가까이 소요되는 수도녹색숲모티길을 다 걷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아름다운 숲길’을 추천한다. 수도녹색숲모티길 출발지인 수도암 아래 수도리 주차장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아름다운 숲길 입구가 보인다. 1930년대 개설된 나무 나르는 길을 보수한 것으로 2007년부터 민간에 개방됐다. 모티길을 우회하는 3.2㎞ 구간으로 낙엽송을 비롯해 잣나무 소나무 참나무류 등이 주요 수종이다. 매년 6~10월 1일 2회 오전ㆍ오후로 나눠 숲 해설이 진행된다. 숲 해설사의 꼼꼼한 안내와 함께하는 생태 학습이다. 이 길을 왕복 2시간 정도로 다시 수도녹색숲모티길로 합류하거나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 있다.
모티길 마지막 코스는 인현왕후길이다. TV드라마의 단골소재인 숙종과 장희빈, 인현왕후의 삼각관계. 인현왕후는 조선 19대 임금 숙종의 계비다. 그녀는 희빈 장씨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남인이 서인을 조정에서 축출한 기사환국(1689년)때 폐서인이 됐다. 궁궐을 나온 인현왕후는 외가(상주) 인근 김천 청암사를 거처로 정한다. 인현왕후가 청암사에 머무르며 거닐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을 김천시는 ‘인현왕후길’이라 이름 짓고 모티길로 조성했다. 출발점이자 도착점인 수도계곡 상류 수도리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수도계곡을 따라 폭 3m 남짓한 소나무 숲길을 걷다 보면 화전민 집터도 볼 수 있고 노루 울음 소리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체력부담도 적고 사람이 많지 않아 조용히 사색하며 걷기 좋은 길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하고 정겹다. 사투리 어감에서 오는 친근감과 함께 지역주민은 물론 관광객에게 농촌의 인심과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박보생 김천시장은 “모티길은 김천의 잘 보전된 자연환경과 문화 유적, 그리고 생태환경을 활용한 트레킹코스로 다른 걷기 길과 차별화된다”며 “2013년 기존 모티길에 인현왕후길과 사명대사길을 추가 조성하면서 또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모티길이 김천관광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천=김용태기자 kr8888@hankookilbo.com 배유미기자 yu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