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장비에 기록 측정까지
더 잘 타려다 재미 잃어버려
다시 페달 밟는 즐거움으로
●타고 싶은데, 타기가 싫어요
언제부터인가 자전거 타러 나가기가 행군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신나게 달리겠노라 월화수목금 내내 노래 부른 주말이 와도 꼼짝하기 싫다. 천근만근 보이지 않는 돌덩이가 몸을 누르는 듯, 침대에 들러붙어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는다. 전날 칼 같이 퇴근했으니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기도 멋쩍다. 그냥 타기가 싫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명령이 떨어진다. ‘나가야 하는데.’ 벽에 기댄 자전거와 눈싸움이 한창인데 노란 햇빛이 침대 깊숙이 침범해 온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어기적대며 이불을 걷어내지만 겨울 해는 정오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 벌써 건너편 아파트 뒤로 사라졌다. 옷을 꿰어 입고 현관을 나서면 하늘이 어둑하고, 한강 자전거도로에 접어들 땐 사방이 캄캄하겠네. 뭉개는 사이 (마법처럼) 텔레비전이 켜졌다. 오늘도 게임오버.
자전거 권태기에 빠진 사람이 많다. 주말마다 수십 킬로미터, 멀게는 춘천으로, 강화도로 내달리다가 어느 순간 무기력증을 호소하며 짐짝처럼 늘어지는 식이다. 열심히 운동하려고 고급 자전거를 산 경우엔 증상이 더하다. 지난 주말 만난 지인이 딱 그랬다. 오랜만에 함께 산책하려고 자동차에서 꺼낸 자전거가 전시장에서 금방 꺼낸 것처럼 깨끗하다. 처음부터 달려있던 타이어마저 전혀 닳지 않았다. 산 지 1년이 넘었는데. 무엇이 켕기는지 둘이서 한참 너스레를 떨다 웃어버렸다. “허허허, 일이 바빴죠?”
그깟 자전거가 뭐라고 안절부절이냐며 구박하는 친구 말처럼 ‘싫으면 치우면 그만’이다. 안 탄다고 누가 잡아가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렇게 두부 자르듯 딱 애정을 끊기가 어렵기에 다들 울적하다. 온라인 커뮤니티마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싶어하지만 왠지 의욕이 안 난다며 우울해하는 사람이 많다. 심하면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한때는 야근 마치고도 30분씩 페달을 밟았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자책한다. (우울한) 우리들의 자전거 사랑은 왜 이리 차갑게 식었을까?
●이유 없는 이별은 없다
자전거 권태기에 들어선 사람들을 보면 한때 정말 열심히 자전거를 탄 ‘자전거족’이 흔하다. 살 빼려고, 친구 따라 놀러 가려고 가볍게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인간관계까지 자전거를 중심으로 짜일 정도다. 그만큼 자전거에 많은 시간과 열정, 돈을 쏟는다.
문제는 자전거를 즐겁게 타려고 들인 노력이 자전거 타기를 취미가 아닌 노동으로 만들 때 나타난다. 화창한 봄날 도로를 달리면서도 신경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이 표시하는 속도에 쏠려 있을 때, 휴일에도 하루 종일 온라인 장터를 뒤지며 장비를 사 모으기 바쁠 때, 그럴 때 권태가 찾아온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자전거와 헬멧, 간단한 보호대만으로 시작했던 산악자전거 타기는 어느새 중노동이 돼 버렸다. 주말이면 새벽 같이 일어나 장비를 챙긴다. 비상식량이나 수리도구 등 자잘한 것들은 미리 가방에 넣어두지만 옷이나 보호장구는 필요할 때 옷장에서 꺼낼 수밖에 없다. 먼저 산까지 도로로 이동하니까 패드가 들어간 속옷을 입고, 가랑이가 높이가 높은 산악자전거용 반바지를 입는다. 겨울에는 추우니까 타이즈도 갖춰 입는다. 이어서 땀 배출과 보온에 도움이 되는 그물소재 내의를 입고, 몸에 들러붙으면서도 재질이 단단한 산악용 재킷을 걸친다. 여기까지 이르면 옷만 입었는데도 숨이 가쁘다. 예전엔 반바지만 달랑 입고 나갔는데.
아직도 챙길 것이 많다. 이런저런 이유로 출발이 늦어지면 복귀 시간도 늦어지니 조명도 필요하다. 헬멧용, 핸들용, 후미용 이렇게 세 개. 나뭇가지에 눈이 찔릴 수 있으니 고글도 꺼내 든다. 마지막으로 물병에 물을 넣고 좁은 현관에 선다. 옛날 복도식 아파트라 벽에 상처를 내지 않고 현관을 나서기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엘리베이터 앞에 섰지만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이 가득하다. 낑낑 대며 자전거를 어깨에 들고 몇 층을 걸어 내려가다 보며 한숨이 절로 난다. ‘내가 지금 이걸 왜 하고 있지?’
권태기에 빠진 다른 사람들 사정도 비슷하다. 자전거 업그레이드나 장비 수집, 기록 측정, 영상 촬영, 심지어 동호회 활동 자체까지 온갖 것에 (스스로) 시달린 끝에 자전거 타기를 포기한다. ‘가민’이나 ‘스트라바’ 등 기록 측정용 장비나 애플리케이션을 관리하느라 자전거를 타는 중에도 몇 번씩 흐름을 빼앗기거나 ‘장비병’에 걸렸다며 한탄하면서도 부품 수집을 멈추지 못하기도 한다. 다달이 자전거를 갈아치우는 사람도 있다. 더 잘 타자고, 즐겁자고 하는 일인데 어쩐지 자전거를 타려는 마음은 점점 희미해진다.
●훌쩍 떠났다, 훌쩍 돌아오기
해법은 간단하다. 온전히 페달 밟는 데만 마음을 쏟으면 잊었던 재미가 절로 살아난다. 먼저 거창한 목표를 세우는 것부터 그만두자. 사흘에 한 번은 타야 한다며 이를 악물지 않아도 좋다. 자전거 값을 라이딩 횟수로 나누며 주말마다 무엇에 쫓기듯 집을 나서지도 말자. ‘한강 라이더’가 되거나 평균속도가 30킬로미터를 못 넘어도 누구도 비웃거나 험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페달이 한결 가볍다.
거추장스러운 장비도 잠시 내려두자. 저지며 타이즈는 벽장에 넣어두자. 자전거도로가 사방에 깔린 동네라면 헬멧마저 벗을 수 있겠다. 스트라바는 꺼버리고 가민이며 액션캠이며 온갖 전자기계 배터리 걱정은 접어두자. 수리도구를 어디다 뒀는지 머리를 잡아 뜯지 않아도 괜찮다. 멀리 가지 않으면 펑크 나도 조금 끌면 되니까. 자전거와 나란히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자전거 덕후질의 끝은 반바지 차림’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모두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친 마음을 달랠 때까지 잠시 내려놓으면 그만이다.
자전거에 재미를 붙인 지 2년 만에 찾아온 권태기는 그렇게 끝났다. 화려한 로드자전거와 산악자전거와 장비는 모두 침대 구석에 치워 놨다. 여전히 ‘빡센’ 라이딩을 사랑하지만 요새는 펑퍼짐한 안장에 엉덩이를 걸치기 편한 어머니의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 때가 많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지만 아직 점퍼 하나면 충분하다. 의무감을 벗고 가벼운 차림으로 바구니 달린 자전거를 타고 슈퍼마켓, 카페로 달리다 보면 매번 놀란다. 멀리 가거나 대단한 목표를 세우지 않아도, 값비싼 울테그라 기어세트나 XT 브레이크세트를 쓰지 않아도 자전거 타기가 즐겁다는 사실에 말이다.
김민호기자 kimon8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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