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범행 입증 자신” vs 변호인 “직접 증거 없어” 치열한 법정공방
지난 7월 14일 오후 경북 상주시 공성면의 한적한 시골마을. 수십 년을 이웃사촌으로 살아온 할머니 6명이 동네 사랑방인 마을회관에서 냉장고에 넣어둔 사이다를 나눠 마신 뒤 차례로 쓰러졌다. 할머니들은 때마침 마을회관을 찾은 주민의 신고로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결국 2명이 숨졌다. 사이다에는 2012년 판매가 금지된 맹독성 농약성분이 검출됐다. 경찰은 마을회관에 함께 있으면서도 유일하게 사이다를 마시지 않은 박모(82)씨를 피의자로 지목해 구속했고, 검찰은 박씨를 재판에 넘겼다.
일명 ‘상주 농약사이다 사건’의 범인으로 검경이 지목한 박씨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한 국민참여재판이 7일 시작됐다. 이번 재판의 최대 쟁점은 수십년간 이웃으로 지낸 박씨가 정말로 다른 할머니들을 숨지게 했는지 여부를 가리는 것이다. 여기에 국민참여재판 사상 최장기인 5일 일정에다 300명이 넘는 배심원 후보자에게 출석 요구서를 보내는 등 재판 규모면에서도 유례없는 기록을 남겼다.
대구지법 제11형사부(손봉기 부장판사)에서 열린 이날 재판은 혐의입증을 자신하는 검찰과 사건발생 때부터 범행을 부인해 온 변호인 측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후 늦게까지 이어졌다.
검찰과 변호인단은 배심원 선정부터 신경전을 벌였다. 이날 오전 9시30분부터 시작된 배심원 선정은 300명의 배심원 후보자 중 100여명이 출석한 가운데 무작위로 뽑고, 재판부 직권 또는 검사, 변호인의 기피신청 끝에 최종적으로 9명의 배심원이 선정됐다. 이 중 2명은 예비 배심원이며, 재판 마지막 날인 11일 배심원 평의ㆍ평결에 들어가기 직전 공개된다. 법원 측은 “5일간 장기 국민참여재판 탓에 직장 등 문제로 배심원 후보자들의 출석이 저조했다”며 “배심원 중에서 유고가 생기면 예비배심원이 평의ㆍ평결에 참여하게 되며, 예비 여부를 알게 되면 재판에 소홀할 수도 있어 미리 공개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배심원들에게는 하루 12만원의 일당(여비)가 지급된다.
배심원이 정해지고 재판이 시작되자 변호인측은 배심원들에게 “그 동안 언론보도는 추측성 기사가 대부분으로, 수사 과정에서 무분별하게 나온 보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재판에 임해달라는 요구였다.
9명의 배심원들은 언론의 취재열기가 부담스러운 듯 했지만 끝까지 진지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검사의 공소사실 설명, 변호인의 반박 등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중했고, 수시로 메모하는 모습도 보였다.
오전 배심원 선정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피고인 박씨는 이날 오후 정식 공판에 출석했다. 이날 출석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부 언론보도와는 달리 박씨가 법정에 출두하자 장내는 잠시 술렁이기도 했다.
오후 1시40분쯤 시작된 정식 공판에 앞서 박 피고인은 10분 전쯤 호송차에서 내려 마스크를 쓴 채 지팡이를 짚고 여성 교도관의 부축을 받으며 비교적 빠른 걸음으로 구치감으로 걸어서 이동했다. 이어 법정에 출두한 박 피고인은 피고인석에 잠시 앉아 있다 허리와 무릎이 아프다며 바닥에 앉아서 재판을 받았다. 5개월 가까운 수감생활에도 불구, 비교적 건강하게 보였다.
재판은 예상대로 검찰과 변호인 측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선공에 나선 검찰은 ▦피고인이 유일하게 사이다를 마시지 않았고 ▦피고인의 집에서 살충제 성분이 든 드링크병이 나온 점 ▦사이다병 뚜껑으로 사용된 드링크제 뚜껑과 유효기간이 같은 드링크제가 여러 병 발견된 점 ▦피고인의 옷과 스쿠터 등 21곳에서 농약성분이 검출된 점 ▦사건 전날 화투놀이를 하다 심하게 다퉜다는 피해자진술 등을 들어 유죄라고 주장했다.
이에 변호인 측은 ▦검찰이 고독성 살충제 구입 경로와 농약 투입 시기 등 직접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70년 가까이 한 마을에서 가깝게 지낸 할머니들을 살해할 동기가 없으며 ▦일부 주민과 농지임대료 문제로 싸운 것은 3, 4년 전 일이며 ▦10원짜리 화투놀이를 하다 싸웠다는 것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등 무죄를 주장했다.
재판 이틀째인 8일은 피해 할머니 중 1명이 증인으로 출석, 증인심문 등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마지막 날인 11일에는 변호인단 최후변론, 검찰 구형, 배심원 평의ㆍ평결에 이어 재판부가 이를 참고해 판결하게 된다. 반면 심문 예정인 증인이 18명이나 되고, 고령의 마을 주민들이 많아 재판이 당초 예정된 11일을 넘겨 내주까지 진행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재판부도 만일을 대비 내주 한 주 다른 재판 일정을 잡지 않고 비워둔 상태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 열린 국민참여재판은 재력가 살인교사혐의로 기소된 김형식 전 서울시의원 사건(6일)인데, 법조 주변에서는 이번 사건이 이 기록을 경신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방청석 80석 규모의 대구지방법원 대법정(11호법정)에는 이날 몰려든 피고인, 피해자 측 가족과 취재진들로 상당수가 서서 재판을 지켜 보았다. 이번 재판과 상관이 없는 변호사들도 수십 명이 재판정을 들락거리는 등 높은 관심을 보였다.
대구=정광진기자 kjcheong@hankookilbo.com 배유미기자 yu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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