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우울증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자살까지 ‘비극’
정신적 성숙 필요… SNS, 정보공유 등 현실보조 기능 제한 필요
최근 인터넷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가 잊혀지길 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른바 ‘잊힐 권리’에 대한 요구다. 미래창조과학부와 인터넷진흥원이 2013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피해 유형을 조사한 결과, 원치않는 사생활 누출 및 유출이 91.3%로 압도적 1위였다. 타인에 의한 개인정보 유포 및 유출 피해가 우려된다는 응답도 77.4%에 달했다. 과거 인터넷 공간에 무심코 올렸던 글과 사진 등으로 인해 계속 누군가에 의해 기억되고 공개돼야 한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이 하나 둘씩 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세탁소’는 이런 흐름에 맞춘 신종 업태다. 이는 인터넷 상에 떠도는 개인정보를 전문적으로 삭제해 주는 서비스로, 현재 국내에 7,8개 업체가 영업 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비스 초기엔 연예인 정치인 등 개인정보 유출의 피해가 막대한 이들이 주로 이용했지만 최근에는 일반인 고객도 늘고 있다고 한다.
20대 취업준비생 K씨도 지금 ‘잊힐 권리’를 위해 투쟁 중이다. K씨는 여자친구와 가졌던 사랑의 행위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SNS에 관련 동영상을 올렸다가, 공개 범위를 잘못 설정하는 바람에 지인들에게 유포되면서 낭패를 보게 됐다. 동영상이 포털을 통해 사이버 공간에서 무한대로 퍼져나가자 K씨와 여친은 죽음과도 같은 나날을 보냈다. K씨는 현재 문제의 동영상을 삭제하기 위한 소송 절차를 밟고 있다.
무심코 게재한 글과 사진이 부메랑으로
사람들은 왜 돌연 인터넷 상에서 잊혀지길 원하는 것일까. 얼마 전까지도 익명의 공간을 휘저으며 자신을 한껏 드러내는 데서 실존의 짜릿함을 느껴오던 바로 그들이 아닌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잊힐 권리에 대한 욕구가 높아진 요인으로 왜곡된 ‘사이버 자아’에 대한 피로도 상승을 꼽는다. 2000년대 스마트폰이 대중화 하자 사람들은 연인과의 만남, 가족 모임, 취미활동, 정치ㆍ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 등 자신의 정보를 SNS 등에 여과 없이 쏟아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턴가 이로 인한 고통의 정도가 즐거움의 수준을 넘어서자 사이버 공간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는 이들이 늘었다는 분석이다.
자아는 자신의 성격, 생각, 감정 등을 지속적으로 인식한다. 이런 자아가 사이버 공간에서 형성된 것이 사이버 자아다. 현실에서 자존감이 높은 사람에서 실제 자아는 사이버 자아와 동일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실제 자아보다 과대 포장된 사이버 자아를 갖게 된다. 이렇게 과대 포장된 자아가 지인들에서,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얻게 되면 사이버 자존감은 상승하게 되고, 계속해서 과대 포장된 자아를 노출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설명한다.
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SNS에 올린 사진이나 글들의 대부분은 타인에게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과시적 내용이 많다”고 했다. 김한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행복드림의원 원장)는 “사이버 자아는 외부 세계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실제보다 좀 더 멋있게, 좀 더 나은 모습으로 표현한다”며 “이런 과대포장은 현실의 주눅 들고 위축된 자아를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이자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시도”라고 했다.
“왜곡된 사이버 자아, 현실감각 상실 불러”
사이버 자아의 과대포장의 문제점 중 하나는 현실감각의 상실이다. 과대 포장된 자아의 노출이 반복될수록 현실 자아와의 괴리는 커지고 현실에의 적응은 점점 더 멀어진다. 김한규 전문의는 “사이버 자아의 왜곡이 강화될수록 현실에서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실종되고, 현실 자아는 초라해지고, 자존감이 점점 낮아지면서 사이버 의존성은 커진다”고 했다.
잊힐 권리가 부각된 직접적인 배경은 과장된 사이버 자아로 인한 피해와 후유증 발생이다. 누릿꾼들은 복제와 유통이 자유로운 사이버 공간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사이버 자아 만들기에 탐닉해 왔다. 그런데 그 결과는 때로 개인의 치부의 무차별적인 확산으로 돌아왔다. 2013년 11월 온 나라를 들끓게 한 가수 A양 누드 누출 파문도 SNS의 가공할 정보 유통 능력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니까 잊힐 권리에 대한 요구는 디지털 세상에 대한 누릿꾼들의 새삼스런 자각과 복기(復棋)의 결과다. 찰라의 선택이 자칫 평생의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누릿꾼들은 최근에 이르는 일련의 사태에서 생생히 목도했다.
한국인터넷진흥원이 국내 인터넷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3.7%가 ‘인터넷 이용자의 기본 권리로서 잊혀질 권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응답자의 41.2%는 ‘인터넷상에서 나의 모든 흔적을 삭제하고 싶다’고 했다. ‘금전적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인터넷상에 있는 자신의 모든 흔적을 삭제해주는 서비스가 있다면 이용할 것’이라는 응답도 28.2%에 달했다. 응답자들은 개인정보, 인터넷 이용기록, 온라인 쇼핑 내역 등 타인에게 공개되지 않아야 할 기록들은 삭제돼야 한다고 답했다.
샤덴프로이데에 대한 반사작용도 원인
잊힐 권리가 부각된 또 다른 배경은 이른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남의 불행에서 얻는 행복)’다. 남이 안 되는 것을 보고 고소함과 쾌감을 느끼는 이들이 증가하는 것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잊힐 권리가 등장했다는 해석이다. 사이버 상에서 벌어지는 특정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에 대한 방어 차원이라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공격은 이른바 ‘지위 불안(Status Anxiety)’이 그 근원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자신의 만성적인 불안감을 투시하고 일시적 쾌감을 얻는 정서적 공감대가 거대한 익명의 공간인 인터넷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박한선 성안드레아신경정신병원 과장은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고도산업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제한 받고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고, 여기에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재난 테러 등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면서 불안에 시달리는 것”이라며 “특히 요즘처럼 취업난에다 승진 누락 등 상시적으로 해고 위험을 경험하는 현대인들은 남의 불행이나 고통을 보면서 쾌락을 느낀다”고 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잊혀질 권리의 충족에 앞서 사회 구성원들의 정신적 성숙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정 개인에 대한 집단적 노출과 공격, 비난 등으로 인한 피해가 극심하기 때문이다. 서정석 건국대충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사생활 누출로 피해를 당한 이들에서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발생이 관찰되기도 했다”면서 “남의 불행이 자기의 행복이 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성숙이 필요하다”고 했다.
부정적 정보의 인터넷 노출에 따른 피해는 자존감 상실, 우울증은 물론 심하면 자살의 비극에 이를 수도 있다. 정선용 강동경희대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교수는 “불특정 다수에게 모든 치부가 공개된 사람은 급격한 불안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다”면서 “대인기피가 심해질 경우 현실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광장공포증과 사회공포증이 생긴다”고 했다.
‘좋아요’와 ‘댓글’로 상징되는 사이버공간에 대한 집착에서 탈피해야 잊힐 권리 등 인터넷 이용의 후유증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도 나온다. 박한선 과장은 “많은 이들이 SNS를 디지털 일기장이나 신문고, 고충상담소 등으로 이용하는데, 이런 식의 접근은 예상 못한 후유증을 야기할 수 있다”며 “인터넷과 SNS는 개인의 불안과 두려움을 올리고 이에 대한 위안을 받는 장소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김치중 의학전문기자 cj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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