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6일, TV를 통해 안철수의원(아직도 저는 의원이라는 호칭이 조금 어색합니다만)의 기자회견을 지켜봤습니다. 또박또박 말투는 여전했지만 약간 달아오른 얼굴은 단호한 결기로 넘쳐 났습니다. 주로 의원회관 집무실을 이용하던 기존 기자간담회와 달리 국회 본청 정론관을 선택한 이유를 주변에서는 의미심장하게 해석했지요. 종전의 주장과는 다른 최후 통첩성이라는 겁니다.
이날 안의원의 발언 수위는 분명 전과는 달랐습니다. 과거 박원순시장에게 서울시장을,문재인 대표에게 대선후보를 양보한 것을 강조하며 새로운 혁신전당대회만이 당을 구하고 정권교체를 이루는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조직도 세력도 없지만 본인이 혁신전당대회에 참여해 패할 경우 깨끗이 승복하고 돕겠다는 조건도 걸었지요. “나와 함께할 생각이 없다면 분명히 말해달라”며 이제 더 이상 어떤 제안도 요구도 하지 않고 묻지도 않을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탈당 배수진까지 친, 말 그대로 최후통첩인 셈입니다.
앞선 3일 ‘My way’를 선언한 문대표는 이날 “아무 이야기하지 않겠다”며 입을 닫았습니다. 다만 밤 늦은 시간 페이스북을 통해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디든 못 가랴/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며 고정희 시인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의 시 구절을 인용해 심경의 일단을 비쳤지요.
자, 3년 전 야권의 유력 대선후보이자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들의 기대가 높았던 두 사람의 관계가 오늘날 이렇게 꼬였을까요. 잠시 3년 전 그날로 기억을 돌려봅니다.
2012년 12월 6일, 날씨는 꽤 추웠습니다. 두툼한 점퍼를 입었음에도 흩날리는 눈발이 목뒤를 파고드는 한파였습니다. 11월 23일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무소속 안철수 후보의 사퇴로 야권통합후보가 된 민주통합당 문재인후보는 이날도 서울과 경기 지역을 훑으며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바빴습니다. 안 전 후보가 사퇴한 후, 근 13일을 침묵했기에 아쉽지만 홀로 뛰었습니다.
오후 3시쯤 되었을까요. 유세차가 경기 고양시를 지나 의정부로 가기 위해 외곽순환도로를 막 타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후보 차량이 IC로 빠져나가는 겁니다. 수행기자단 버스도 무작정 따라 붙었습니다. 처음엔 사고가 났나 싶었습니다만 곧 전화벨이 울리고 상황파악이 되었지요. ‘드디어’ 안철수가 회동 제의를 해온 겁니다. 꽁꽁 숨어있던 그가 오후 4시 20분 서울 정동 ‘달개비식당’에서 문후보와 만나 유세 지원방안에 대해 대화하자고 한 것이지요. 삽시간에 달개비 식당 앞 골목은 생중계를 위한 방송과 취재기자들로 뒤덮였습니다.
안 전 후보는 “아무 조건 없이 제 힘을 보탤 것”이라며 다음날 부산 남포역에서 문후보와 공동유세를 갖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선거지원활동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대선이 13일 밖에 안 남았지만 새누리당 박근혜후보에게 열세를 보이던 문후보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지요.
다음날 부산에서의 공동유세를 시작으로 문재인, 안철수는 대전과 군포, 서울 광화문 등에서 차례로 합동 유세를 가졌습니다. 노란색 물결이 춤추면서 군중은 늘어났고 선거를 이틀 앞둔 12월 15일 안 전 후보는 문후보에게 목도리를 건네며 따뜻한 격려를 건넸지요. 아름다운 광경이었습니다.
12월 19일, 운명의 날이 밝았습니다. 투표를 마친 안철수 전 후보는 결과에 관계 없이 문후보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며 인천공항으로 향했습니다. 배낭을 등에 맨 학생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호칭은 다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 바뀌었지요. 본 모습(?)인 교수 직함을 찾은 것입니다.
안철수의 양보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은 패했습니다. 51.6%의 국민은 문재인보다 새누리당 박근혜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3년이 흘렀습니다. 안철수 교수는 2013년 3월 귀국해 정치인으로 변신했습니다.정의당 노회찬의원의 의원직 상실로 인한 서울 노원병 재보선 출마, 국회의원 당선, 새정치연합 창당 중 민주당과 합당했고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당명 아래 김한길의원과 공동대표를 역임했습니다. 지난 해 7월 30일 재보선에 참패한 후 김 의원과 함께 공동대표직을 사임하고 평의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사이, 대선에서 패했지만 의원직을 유지했던 문재인은 올해 2월 전당대회를 통해 2년 임기의 새정치민주연합의 대표가 되었지요. 둘의 갈등은 이때부터 아니, 이후 크고 작은 선거 패배와 당 내홍에서 비롯됩니다.
당권을 쥔 문재인대표는 재보선 등 크고 작은 선거에서 새누리당에 완패하며 리더십이 흔들렸습니다. 안철수의원에게 인재영입위원장과 혁신위원장을 제의했지만 동의를 얻지도 못했지요. 당 혁신위원장은 김상곤 전 경기교육감이 맡게 됐고 혁신안 발표로 인해 사태는 폭발됩니다. 주류와 비주류, 친노와 비노 등 해묵은 논쟁(언론의 책임이 큽니다만)이 다시 시작됐고 안철수, 박지원 의원 등 비주류는 문대표에게 사퇴를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2015년 겨울, 사퇴 압력에 시달리던 문재인대표는 당내 빅3 대선주자인 문재인, 안철수, 박원순이 공동권한을 갖고 2016총선에 임하자는 ‘문안박’연대를 제안합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동참의사를 밝혔지만 안철수의원은 거부했지요. 대신 안의원은 문대표가 물러난 후 혁신전당대회를 열어 새 지도부를 뽑자는 의견을 전했습니다.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문대표의 거부입니다. 이제 서로 마주보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All or nothing’ 게임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과 문재인, 안철수 두 사람의 관계는 현재 최악의 길로 치닫고 있습니다. ‘위기가 곧 기회’이고 ‘동이 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는 말이 있다지만 별로 와 닿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건강하고 굳건한 야당이 있어야 정치가 발전한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3년 전인 2012년, 문재인 대선후보를 취재하며 좋아하고 존경했던 안철수 ‘교수’를 함께 지켜봤던 기자의 단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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