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은 10분의 1만 찍고 현수막엔 지역구 표시 안 해
올해 넘기면 예비후보 자격 상실… 손배소 등 불 보듯
내년 4ㆍ13 총선 예비후보 등록 시작(15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지만, 선거구 획정이 늦어지면서 출마 예정자들이 애를 태우고 있다. 시험날은 받아놨는데, 출제 과목도 시험 범위도 정해지지 않은 형국이기 때문이다. 특히 분구나 합구 대상인 지역에 출사표를 낸 정치 신인들은 “깜깜이도 이런 깜깜이 선거가 없다”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여야가 올해 안인 이달 31일까지 선거구 획정을 완료하지 못할 경우 후보 등록 취소 사태까지 벌어질 위기다.
누가 내 유권자인지 모르는 ‘반쪽 선거운동’
서울 강남 분구 대상 지역에 출마를 준비중인 이은재(18대 새누리당 비례대표) 전 한국행정연구원장은 지역을 누비다 종종 주민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여기서 출마하시려고요? 분구가 안될지도 모르는데 왜 우리 동네에 왔다 갔다 하세요?” 이 전 원장은 “그럴 때마다 머쓱하지만, 뭐라 똑 부러지는 답을 내놓을 수도 없어 웃고 만다”며 “그냥 ‘강남의 발전을 위해서 열심히 해보려고 한다’는 식으로 답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강남은 현재의 갑ㆍ을 지역구에 하나를 더해 병 지역구가 신설될 가능성이 높지만 갑ㆍ을ㆍ병이 어떻게 분할될지 윤곽조차 없다 보니 벌어지는 일이다.
합구 대상 지역에선 ‘반쪽 선거운동’을 감수해야 한다. 부산 서구에 새누리당 소속으로 출마하려 뛰고 있는 곽경택 감독의 동생 곽규택 변호사는 “기존의 중ㆍ동구에서 동구가 떨어져 나와 서구와 합쳐질 게 뻔한데도 동구에선 내 이름을 알릴 수가 없다”며 “눈 뜨고 유권자 절반만 만나야 하는 처지”라고 속을 태웠다. 서울 성동 갑ㆍ을 중 일부와 합구 가능성이 점쳐지는 중구도 마찬가지다. 배우 심은하씨의 남편인 지상욱 새누리당 중구 당협위원장은 “주위에선 성동구도 미리 다져놔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상도의상 그럴 수 없어 문상 등 개인적인 일로 찾을 기회가 있을 때만 인사를 하는 정도”라고 말했다.
지역구 깜깜이라 명함도 무용지물 위기
출마자들은 선거운동의 ‘실탄’이랄 수 있는 현수막이나 명함 제작에도 적잖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선거구 획정으로 지역구가 바뀌게 되면 다시 찍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는 탓이다. 강남 을에 출사표를 던진 전현희 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어느 동(洞)이 내 지역구가 될지 알 수 없어 사무소를 옮길 경우까지 생각하고 있다”며 “그럴 경우 명함을 다시 찍어야 하니 통상 1만장은 제작해야 것을 일단 1,000장만 주문해놨다”고 말했다.
예비후보 등록과 동시에 사무소 건물에 내걸 대형 현수막에 지역을 표기하지 않는 사태도 벌어졌다. 서울 중구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를 준비 중인 박근혜정부의 청와대 대변인 출신 김행 전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은 “처음에는 이름 앞에 ‘중구를 살리는’이라고 넣었다가, 성동구가 포함되면 어쩌냐는 조언을 듣고 ‘중ㆍ성동구를 살리는’이라고 바꿨지만, 그것도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에 결국 ‘지역을 살리는’으로 확정했다”고 말했다. 김 전 원장은 “현수막을 세 번이나 제작해 결국 ‘지역구 없는 후보’로 유권자들에게 첫 인사를 드리게 된 셈”이라고 씁쓸해했다.
아예 선거구 획정이 완료될 때까지 예비후보 등록을 미룬다는 출마자도 있다. 분구 가능성이 높은 인천 연수에 도전장을 낸 원내대변인 출신 비례대표 민현주 새누리당 의원은 “기존 연수구에서 송도가 분구될 것을 예상하고 뛰고 있는데 예비후보로 등록해도 새 지역구가 아닌 연수구 예비후보가 되는 것 아니냐”며 “현재로선 예비후보 등록을 미루려고 한다”고 말했다. “엄밀히 말해 현재는 선거구가 존재하지 않는데, 예비후보 등록을 하는 게 과연 맞느냐”는 문제제기다.
올해 안에 선거구 획정이 마무리 되지 못할 경우 예비후보 자격을 잃게 되므로 선거가 치러지더라도 행정소송인 선거무효 소송과 각 정당을 상대로 한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이 대거 제기될 우려도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경기 남양주 분구 대상 지역에 출마를 준비중인 조광한 전 참여정부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은 “국회의원들이 현역 기득권에 안주해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지은기자 luna@hankookilbo.com
정승임기자 cho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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