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 깨뜨리고 의자 집어가고 스태프 행세하는 사기꾼도 등장
무너지고 금 간 주택들, 벽화 정비사업과 함께 역사 속으로
tvN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주인공 성덕선(혜리)이 청재킷을 머리 위로 흔들며 뛰던 골목길은 극중에서 서울 도봉구 쌍문동으로 그려진다. 관객 695만명을 동원한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주인공 원류환(김수현)이 살던 ‘석이슈퍼’는 원작 웹툰에선 서울의 어느 달동네에 있는 것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골목길과 석이슈퍼 장면은 인천 부평구 십정동 ‘열우물 벽화마을’에서 촬영됐다. 이제는 도심에서 찾아보기 힘든 옛 동네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열우물 마을은 영화 ‘악의 연대기’, SBS 드라마 ‘가면’ 등 여러 영화와 드라마 배경으로도 등장했다.
전국 날씨가 영하권으로 떨어진 16일 찾은 열우물 마을은 적막했다. 영화와 드라마 주인공이 걸어나올 것 같은 골목은 지팡이를 집은 주민과 고양이들이 지켰다. 골목 어귀에는 타고 남은 연탄재들이 쌓여있었다.
미끄럼틀 같이 경사진 골목길 계단에 칠해진 벽화는 벗겨지고 빛 바래 있었다. 동네 안 쪽으로는 ‘ㅇㅇ상회’ ‘ㅇㅇ양품’ ‘ㅇㅇ제과점’ 간판을 단 가게들이 줄 서 있어 1980년 대 거리 풍경을 재현해놓은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이 마주 지나기조차 버거운 골목길을 벗어나 차량 1대가 빠듯하게 다닐만한 길로 접어들면 비교적 최근 그린 벽화들을 볼 수 있다.
십정동에 벽화가 그려진 것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가 닥친 1997년부터다. 1995년부터 십정동에 거주하고 있는 이진우 거리의 미술 대표가 조금이라도 동네를 환하게 만들어보자고 시작한 것이다. 2002년에는 거리의 미술, 인천희망그리기 등이 함께 열우물 프로젝트 추진위원회도 구성했다. 십정동 일대가 2007년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로 지정되면서 수 차례 중단되기도 했지만 벽화 그리기는 최근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열우물 마을이 있는 십정동은 과거 인천 시내에서 부평 쪽으로 넘어 가다 보면 처음 만나는 마을이었다. 지금도 마을 아래 열우물사거리는 부평구와 남구, 남동구와 서구를 서로 연결한다. 광활한 염전이 마을 아래 자리잡고 있던 옛 십정동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1960년 대 말에서 1970년 대 초로 추정된다. 고향을 떠난 수도권 철거민들이 몰려 들어 다닥다닥 집을 지어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염전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수출산업 5·6차 국가단지(부평·주안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동네에 잠시 돈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다시 산동네, 달동네가 됐다.
열우물 마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인기를 얻으면서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마을은 과거나 달동네가 등장하는 영화, 드라마 배경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알려지고 덩달아 벽화마을도 인기를 얻으면서 열우물 마을은 하루아침에 인기 관광지가 됐다. 주말이면 벽화마을을 찍으려는 사진 동호회 등이 마을로 몰려왔고, ‘한류’ 열풍이 불면서 중국인 관광객들도 하나둘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였다. 주민들이 있건 없건 셔터를 누르는 사람, 남의 집 앞에서 시도 때도 없이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 등 배려를 잃은 방문객이 늘어났다. 주민들은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라고 했다. 관광객들은 그나마 나았다. 영화와 드라마 촬영진들은 열우물 마을을 ‘빈 동네’ 취급했다. 처음에 영화와 드라마 촬영이나 관광객들을 반기던 주민들은 이제는 “지쳤다”고 고개를 저었다.
열우물 마을에서 23년째 살고 있다는 한 주민은 “처음에는 영화, 드라마 촬영한다고 오면 좋아했지만 이제는 ‘저 XX들 또 왔네’하는 생각 밖에 안 든다”며 “소품으로 쓴다고 화분, 의자 가져가서 안 돌려주고 집주인 허락 없이 지붕에 올라가 기왓장을 깨뜨리고 차 수십 대가 갑자기 들이닥쳐 집 앞을 막는 것도 한 두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른 주민은 “스태프들이 주차된 차량을 이동시킨다며 키를 받아가 놓고 돌려주지 않은 사례도 있었다”며 “스태프들이 (촬영 협조 차원에서) 몇 푼 쥐어주는 돈 때문에 식구 같던 이웃들끼리 원수가 된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심지어 스태프 행세를 하며 가게에서 커피를 몇 상자씩 외상으로 가져갔는데 알고 보니 도둑으로 드러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급기야 지난 10월에는 한 주민이 영화 촬영을 못하게 막은 일까지 벌어졌다. 부평구청이 영화 세트장을 보전하려던 계획도 주민 반대에 부딪혀 무산된 적도 있다.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 나온 석이슈퍼 세트장도 이미 철거됐다.
벽화마을에 사는 주민들의 바람은 하나다. 10년 만에 재개되는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국토교통부와 인천시는 11월 정비사업과 연계해 기업형 임대주택(뉴스테이) 3,000가구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재개한다고 발표했다.
사업방식은 보상비가 많이 드는 수용방식에서 재개발·재건축에 주로 적용되는 관리처분방식으로 변경한다. 이 방식은 정비구역에 소유한 토지와 건물 가치를 평가한 뒤 일반분양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반영해 소유자에게 신축 재산으로 돌려주는 방식이다.
국토부와 인천시는 내년 초 토지 등 소유자, 세입자들 동의를 받은 뒤 절차를 밟아 2017년 상반기 착공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열우물 마을 일대(십정동 216번지 19만3,066㎡)는 2007년 지구 지정이 됐지만 사업 시행 주체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자금난, 낮은 사업성, 부동산 경기 침체 등으로 지장물 조사 단계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갔다. 보상금만 1조원 규모로 추정됐다.
문제는 지은 지 20~30년이 넘은 낡은 건물들이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건물이 1,488개에 이르고 빈집도 해마다 늘고 있다. 2011년에는 집중 호우로 빈집이 무너져 다른 집을 덮치는 사고가 일어났고 지난해에는 2가구가 사는 집 담벼락이 무너지는 아찔한 일도 있었다.
국토부에 따르면 열우물 마을 일대에는 주민 총 2771세대가 거주 중이다. 이중 약 18%인 510세대가 집이 있어도 자력으로 주거 여건을 개선하기는 어려운 주민들이다. 기초수급자가 334세대, 차상위 계층이 176세대이다.
사업 재개가 결정됐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불안하다.
집과 가게가 모두 이곳에 있는 한 주민은 “사업이 다시 멈추지는 않을지, 없는 사람 쫓아내고 떠나 보내는 사업은 아닌지 두렵다”라며 “정부고 인천시고 다 못 믿겠다”고 말했다. 다른 주민은 “마을에 7평, 10평짜리 주택에 살던 사람들이 대다수인데 25평짜리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해도 돈이 없어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일 것”이라고 말했다.
사업이 추진되더라도 열우물 마을 프로젝트는 마을을 가꾸는 방식에서 기억에 남기는 방식으로 바뀌어 계속될 전망이다.
이 대표는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재개되면 벽화사업은 중단하더라도 주민들의 삶과 마을의 흔적들을 그림이나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은 계속할 것”이라며 “개인적으로 열우물 마을을 그림에 담는 작업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글·사진 이환직기자 slamh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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