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마니아’ 최희숙(41ㆍ여ㆍ서울)씨는 올 겨울 멋진 휴가를 보내기 위해 24일 부산을 찾았다.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을 경험했던 최씨는 이번엔 부산의 갈맷길 도보여행을 즐길 참이다. 최씨는 “해양도시의 이색 풍경에다 지칠 때마다 땀을 씻어주는 해풍의 매력이 일품”이라고 말했다.
부산은 예로부터 산과 바다, 강이 아름다워 ‘삼포지향(三抱之鄕)’이라 불렸다. 지금은 번화한 시가지를 품은 도시 허파로서의 산, 전국 피서객을 불러모으는 바다, 시민에게 산책로를 제공하는 강으로 변했지만 이러한 요소들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게 한 게 ‘갈맷길’이다. ‘갈맷길’이란 이름은 부산시의 시조(市鳥)인 ‘갈매기’와 ‘길’의 합성어로, 부산시가 시민 공모를 통해 확정했다. ‘갈매’는 순수 우리말로 ‘깊은 바다’를 뜻하기도 한다.
갈맷길은 2009년 6월 7일 태어났다. 부산시는 당시 전국 광역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걷고 싶은 도시’를 공식 선포했다. 시는 그 해부터 628억원을 투입해 단절된 숲, 해안, 강변길을 연결했다.
현재 갈맷길은 총 263.8km, 700리에 달하는 거리다. 길은 9개 코스 20개의 작은 구간으로 나뉜다. 9개 코스를 모두 답사하려면 어른 걸음으로 약 86시간이 걸린다. 짧게는 5.7㎞(해운대 문탠로드~수영구 민락교, 2코스 1구간)에서 길게는 23㎞(구포역~성지곡수원지, 6코스 2구간)에 이른다. 특히 전 구간 단절되지 않고 순환코스로 이뤄졌으며 소요시간과 거리, 노면상태, 경사 등을 감안해 코스를 상ㆍ중ㆍ하로 등급화해 편의를 더했다. 해운대 삼포길과 사하 몰운대길, 영도 절영해안산책로는 국토교통부가 전국의 해안누리길 가운데 대표노선으로 선정한 곳이다.
갈맷길이 인기를 끌면서 부산을 주 무대로 한 ‘걷기 동호회’가 인터넷 공간에서 활성화되고 있다. 정기적으로 투어에 나서고 있는 회원들은 체험기와 사진 등을 올려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매년 5월이면 광안대교를 걷는 ‘다이아몬드 브리지 걷기축제’와 10월 ‘갈맷길 축제’는 부산의 대표 관광상품으로 자리매김까지 했다. 500~1,000명이 참가하는 ‘소규모’ 걷기 행사는 거의 매주 열린다. (사)걷고싶은부산 관계자는 "부산시민들에게 이제 걷기는 일상생활이 됐다. 연중 500명 이상 참가하는 걷기축제가 무려 70건이 넘는다"고 말했다.
전체 263.8㎞에 달하는 갈맷길은 사실 정확한 이용자를 추산하기 어렵다. 부산시는 2013년 산ㆍ바다ㆍ강을 지나는 4개 구간을 선정해 표본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이기대길(2코스)의 하루 이용자가 4,399명으로 가장 많았고, 금정산길(7코스) 3,424명, 절영해안산책로(3코스) 467명, 회동수원지길(8코스)이 377명으로 집계됐다. 1개 구간당 하루 평균 2,166명이 걷는 셈이다. 전체 20개 구간인 만큼 산술적으론 하루 4만3,000여명이 걷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2012년 부산발전연구원의 조사(봄ㆍ주말 기준)에서는 이기대길 1,500명, 회동수원지길 2,000명, 해운대 삼포길이 2,000명으로 집계됐다.
기자는 23일 갈맷길 중 대표 구간을 한번 걸어봤다. 1코스의 끝 지점에 속하는 ‘해운대 삼포길’은 동백섬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시작됐다. 2005년 APEC 정상회의가 열렸던 누리마루와 해운대 경치에 감탄했다던 최치원 동상을 지나니 목재 데크로 된 산책로가 나타났다. 우거진 소나무 너머로 해운대 전경이 펼쳐지면서 유독 젊은 연인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둥근 호를 그리는 해운대해수욕장을 통과하니 삼포(三浦) 중 첫 번째 포구인 미포에 다다랐다. 영화 ‘해운대’에 등장했던 미포에서부터는 화려함과 소란스러움이 사라졌다. 언덕을 따라 미술관과 고급 주택이 자리한 달맞이길은 이름처럼 매력을 뽐냈다. 봄날에는 분홍빛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상춘객들이 북적거리는 곳이다. 달맞이길을 천천히 오르다 보니 ‘문탠로드’라고 불리는 오솔길과 만났다. ‘문탠’은 피부를 햇볕에 그을리는 ‘선탠’처럼 달빛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문탠로드는 미포 초입부터 달맞이 어울마당까지 2.2㎞에 달한다. 차도와 접한 달맞이길에서 벗어나 한가로이 명상에 빠지기 적당한 길이다. 문탠로드의 종점이자 해운대 삼포길의 중간 지점인 달맞이 어울마당은 쉼터로 손색이 없었다. 세련된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줄을 지어 차를 마시거나 끼니도 해결할 수 있다. 달맞이 어울마당에서 다시 오솔길로 접어드니 청사포 방향이다. 한적한 어촌 청사포는 바다 위 등대가 인상적.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개구이집과 횟집은 겨울 낭만을 더했다. 누리마루에서 3시간 남짓 걸었더니 해운대 삼포길이 끝나는 구덕포에 이르렀다. 구덕포는 청사포보다 작은 마을로 송정해수욕장과 붙어 있다.
갈맷길의 또 다른 인기 포인트는 이기대(二妓臺)공원 해안산책로. 산책로를 따라 굽이굽이 돌 때마다 절경을 선사한다. 과거 군사시설 등으로 민간의 접근이 통제됐다가 1993년 개방돼 희귀 동식물도 많이 서식하고 있다. 갈맷길 2코스에 해당하는 이 산책로는 오륙도 해맞이 공원까지 부처가 아기를 안고 있는 듯한 농바위를 비롯해 기묘하게 생긴 지형이 숨어 있어 전혀 지루하지 않다. 간간히 바닷바람이 불지만 아직은 차갑지 않다.
부산 영도 남서쪽 해안에 조성된 절영해안산책로도 기막힌 걷기 코스. 해안길과 절벽 일대 전망대, 돌계단, 출렁다리 등을 따라 산책로를 걸으면 파도가 들려주는 노랫소리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 산책로 전체 길이는 3.3㎞로, 풍경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걸으면 2시간가량이 소요된다. 절경은 ‘무지개 다리’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늘 전망대’, ‘대마도 전망대’, 출렁다리를 지나 ‘절영 전망대’까지 약 500m 구간이 하이라이트. ‘하늘 전망대’는 산책로에서 해안도로 쪽으로 5분 가량 올라가면 닿는데 해안 비탈에 ‘ㄱ’자 형태의 전망대가 조성돼 있다. 발 아래가 훤히 보이는 투명 바닥재를 사용, 약간의 긴장감도 안겨준다. 야간 경관 조명이 설치돼 일몰 이후에도 들러볼 수 있다.
서병수 부산시장은 “갈맷길에는 바다와 강, 산이 어우러진 부산만의 매력과 함께 지역 역사성도 고스란히 녹아있다”며 “갈맷길이 시민들에게는 ‘힐링’의 즐거움을 주고, 전국의 걷기 마니아들에겐 잊지 못할 명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부산=전혜원기자 iamjh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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