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이라는 분야에서 오늘날 가장 절실한 과제가 무엇인지 꼽아보라면, 선명한 극단화가 아닌 실천적 논의를 유도하는 환경의 조성이라고 답하고 싶다. 근거보다 믿음에 기반하고, 진보의 폭은 부족해도 역진되지 않는 탄탄한 합의보다는 눈앞의 타인에 대한 조롱이 우선시되며, 과제에 대한 해결 의지보다 진영에 대한 지지 표명이 칭찬받는 소통 환경과는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페른백(Fernbach)의 2013년 심리학 연구가 좋은 단초를 주고 있다. 연구자들은 실험참여자들의 복합적인 정책 사안에 대한 의견 극단성을 측정하고, 몇 가지 실험 조건을 거친 후 입장의 변화를 보았다. 어떤 참여자들에게 주어진 실험 조건은 왜 그 정책을 자기가 지지 혹은 반대하는지 이유를 설명하게 하는 것이었다. 반면 다른 참여자들에게는 그 정책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작동 기제를 자신들이 설명해보게 했다. 과연 정책이 해결하고자 하는 과제는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문제점을 공략하며,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보는지, 기계적 과정들 말이다.
지지 또는 반대의 이유, 즉 “입장”을 이야기한 이들은 실험 후에도 의견의 변화가 미미했다. 그런데 정책의 작동 기제를 설명해본 이들은 입장이 훨씬 덜 극단적인 쪽으로 변했다. 이런 차이의 발생 이유로 밝혀진 것이 바로, 참가자가 자평한 사안에 대한 이해도다. 작동 기제를 설명한 이들은, 자신들이 그 정책에 대해서 당초 스스로 믿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덜 알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것이다. 그렇기에 이 연구를 정리한 논문은 ‘정치적 극단주의는 이해의 착각에 의하여 지탱된다’는 제목이 붙었다.
내가 해당 사안을 잘 알고 있다는 굳은 믿음으로 무장하면, 이미 입장이 정해진 상태에서 그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본들 바뀌지 않는다. 그런 이들이 긴밀하게 팀을 이루어 서로를 진영으로서 지지해주기 시작하거나, 더 안 좋은 경우에는 특정인의 심기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나선다면, 이해의 착각 속에서 무지한 극단화만 깊어질 위험이 생긴다. 그러나 사람들과 대화하며 작동 기제를 설명하고 디테일을 계속 따져나가다 보면, 그때 비로소 사안의 복잡함, 자신이 이해하는 바의 내역과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투철한 믿음을 통한 진영 승리가 아닌, 이성적 과제 공략이 눈앞의 숙제로 던져지는 것이다.
언론이 무슨 권력구도 소설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의 작동 기제 설명에 특화한 보도 형태를 더욱 발달시키는 것도 좋다.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과정에 대한 설명을 해내는 이들에게 명성을 적립하는 보상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생각해볼만하다. 과정의 디테일에 약한 정치인, 담론가들을 가차없이 폄하하는 여론 조성도 괜찮다. 지나가는 개인들이든 청와대의 수장이든, 기제를 따지도록 유도하는 소통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다.
미디어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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