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의 우리가 누리는 기술은, 원했던 바로 그것을, 제시간에, 마땅히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맞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대공황이 한창이던 1929년에 비슷한 질문에 사로잡혔다. 그의 침울한 저서 ‘문명 속의 불만’에는 이런 푸념이 이어진다.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수백 마일 밖에 사는 내 아이의 반가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통신 기술은 기쁨을 주지만, 애초에 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철도가 없었다면 아이는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의학의 발달로 유아 사망률이 극적으로 줄고 여성은 산욕열의 위험에서 벗어났으며 문명인의 평균 수명도 늘어났지만, 우리 삶이 고통스럽고 기쁨이 없으며 비참하기 그지없어 오직 죽음만을 바라고 살 뿐이라면 오래 산다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1929년만큼이나 심각한 경제 불황기인 2010년대에도 문명 속의 불만은 유효하다. 예컨대 아이폰과 함께 시작된 스마트폰 붐이 십년쯤 빨리 시작됐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무엇을 더 얻거나 잃게 되었을까? 내연기관을 사용하는 자동차가 전기자동차로 바뀌게 된다면 정비사들의 일자리는 어떤 타격을 입게 될까? 이로 인해 그의 가족이 한동안 포기해야 할 행복은 뭘까? 스리마일과 체르노빌,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아무 사고 없이 지금껏 운영됐다면 핵발전 수출대국을 노리는 대한민국의 야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4대강 사업이 없었다면 잉어, 강준치, 메기, 동자개는 녹조에 파묻히지 않고 지금껏 살아 있을 수 있었을까?
더 좋은 사회를 이루기 위해선 세상을 구성하는 다양한 힘에 기술이 어떻게 뒤섞이는지 끈질기게 묻고 대답을 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극히 한정돼 있다는 사실과 대면하는 일이기도 하다. 기술의 근본은 권력이 작동하고 경제와 결합하여 담론의 중층적인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기술이 제시간에 제자리에 도착하려면 좋은 언어와 정치, 경제가 선순환되어야 한다.
기계비평을 해야만 하는 이유
지난 4월부터 이번 주까지 35회에 걸쳐 연재된 ‘프로메테우스 만물상’도 같은 문제의식 아래 글을 이어 나갔다. 이 시리즈는 기계비평(이영준), 적정기술(홍성욱), 디지털 비평(임태훈)의 세 축에서 우리 시대의 기술 문화를 진단했다.
기계비평은 당연시되는 기계의 존재, 세부와 재료, 설계와 미묘한 작동에 관해 묻고 따지는 비평적 사유와 실천 활동을 의미한다. 이영준은 비평의 시선이 쉽게 닿지 않았던 패스트푸드식당 부엌, 야구장, 수술실, 지하철역과 발전소, 정수장 등을 직접 취재하고, 그곳에서 작동되는 기계에서 무엇을 배우고 깨달았는지 꼼꼼히 기록했다. 그의 기계비평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직접 체험하고 쓰는 수행성이다. 어떤 소재와 주제를 다루더라도 그가 되풀이해 보여 주는 것은 ‘기계비평가 되기’의 중요성이다. 직업적인 비평가가 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평범한 생활인의 습관에도 기계비평가 되기는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를 둘러싼 사물의 이치를 궁금히 여기고 면밀한 관찰과 사유에 이르는 시간이 보장될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확인할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자동화 시스템이 삶을 촘촘히 지배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버튼을 누르는 단순한 동작이 체험과 사유의 시간을 얄팍하게 압축한다. 게다가 현대인은 자발적으로 이 시스템에 중독되어 있다.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돈 버는 데 필요한 일 외에는 시간이 많이 드는 복잡한 과정을 견디지 못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은 버튼으로 이뤄진 디스플레이 인터페이스일 뿐, 유기적 다양체인 기계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버튼 너머의 세계에서 자기 언어로 생각을 적어 나가는 기술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것은 버튼 위에 짓눌린 시간을 복원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저개발국을 위해 무엇을 할까
홍성욱이 적정기술을 통해 보여 준 우리 시대의 기술 문화는 선한 마음과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로 가득한 발명의 세계이면서, 저개발국가의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는 비참한 가난과 질병, 재앙의 한복판이기도 했다. 동물의 배설물이 뒤섞인 더러운 웅덩이를 식수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발명품, 난방과 음식 조리, 세탁에 필요한 에너지를 태양광과 인간 동력으로 얻는 발명품 등등 현지인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적정기술의 성과는 실로 감동적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저개발국가의 가난과 질병, 온갖 구조적 모순과 병폐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순 없다. 적정기술도 이러한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적정기술 개발은 발전을 위한 ‘수단’이고 ‘도구’이지 개발 자체가 최종 ‘목적’이 아니다. 적정기술의 본령은 세계관과 플랫폼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다양한 해결책을 제안하는 대안적 세계관의 모색이면서, 디자인, 비즈니스, 국제개발협력 등의 다채로운 영역과 접속하고 융합하는 플랫폼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적정기술의 소임이라고 한다.
노동자편에 선 디지털 기술
임태훈이 디지털 비평을 통해 전달하려 했던 주제는 ‘우리 시대의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날로 비참해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편에서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한국 정보통신기술 담론에서 ‘노동’의 문제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소외되어 있다. 디지털 시대의 책사를 자처하며 정부나 기업의 의사 결정에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는 이들은 많다. 하지만 노동자 입장에서 디지털 신자유주의의 폭압에 맞설 방법을 고민하는 목소리는 초라하다.
사물인터넷, 디지털 헬스케어, 웨어러블 컴퓨터, 드론, 빅데이터 등의 새로운 대세를 형성하리라 기대받는 차세대 기술은 인간 존엄과 자율, 건강한 사회 공동체의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을 보장하기보다 독점기업과 금융자본의 이윤 극대화를 뒤쫓고 있다. 인터넷 환경도 심각하게 오염됐다. 인터넷은 집단지성을 활용하는 촉매제라고만 볼 수 없게 됐다. 일베와 그 아류들이 온갖 사이트에서 증식하는 집단저능의 배양기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무작정 배제할 수도 없다. 자본의 요구에 복무하느라 억압돼 있던 해방적 역량을 발휘할 방법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에도 충분히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편에서 재시동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패러다임 전환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프랑켄슈타인이 되길 거부하자
이제 ‘프로메테우스 만물상’을 마무리할 차례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에 빗대 생각해 볼 만한 소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토 게이카쿠와 엔죠 토우가 함께 쓴 ‘죽은 자의 제국’이라는 공상과학 소설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세기 영국이지만, 실제 역사 속의 영국이 아니라 스팀펑크(과거기술에서 발달된 상상의 사회) 세계관으로 뒤바뀐 대체 역사를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죽은 자의 제국’에 등장하는 19세기 영국에는 증기기관과 펀치카드를 이용한 기계식 컴퓨터가 인터넷처럼 통신망으로 깔렸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보다 더 악랄한 자유경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시체를 되살린 프랑켄슈타인이 대량으로 공급된다. 산업계와 군대가 필요로 하는 단순 노동 인력은 거의 다 프랑켄슈타인으로 대체됐다.
프랑켄슈타인은 죽은 사람의 뇌에 ‘네크로웨어’라는 가짜 영혼을 인스톨해서 제조된다. 수요보다 프랑켄슈타인의 공급이 모자랄 때는 산 사람의 뇌를 마약으로 혼미하게 해서 네크로웨어를 주입하기도 한다. 프랑켄슈타인은 프로그램된 행동밖에 하지 못한다. 겉보기엔 사람과 다를 게 없지만 정신 상태는 로봇이나 마찬가지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프랑켄슈타인 수출을 위한 전문 공장이 운영되고 있고, 자살과 인신매매가 공공연히 벌어진다.
공장과 전쟁터에서 프랑켄슈타인은 쉽게 쓰고 버리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임금을 받지 못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아무리 신체가 훼손돼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다. 프랑켄슈타인을 사들이는 편이 보수해서 쓰는 것보다 비용이 싸게 먹힌다면 일말의 미련도 없이 폐기 처분한다. 전쟁터에서도 프랑켄슈타인들은 공포, 불안, 증오, 애국심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프로그램된 대로 움직이며 상대 프랑켄슈타인과 살육전을 벌인다.
프랑켄슈타인 덕분에 큰돈을 번 정치가와 사업가들은 죽은 자로만 이뤄진 국가를 세우려 한다. 그들에겐 얼마나 좋은 나라란 말인가! 세금 없고 노조 없고 규제도 없는 나라다. 언론도 없고 민주주의나 선거 따위에 휘둘릴 일도 없다.
황당한 소설 같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도 황당하긴 마찬가지다. 지금과 같은 기조의 노동 정책이 계속된다면 머지않아 정규직은 역사 속의 개념으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산업생태계 변화는 비정규직뿐만 아니라 로봇과의 일자리 경쟁마저 강요할 것이다. 복지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서 사회안전망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고, 무능한 정치 때문에 장래는 더욱 암담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다. 마땅히 요구할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회가 이 시대에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지켜져야 한다. 그 일을 위해 필요한 프로메테우스의 도구를 함께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때다.
임태훈ㆍ인문학협동조합 미디어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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