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 내린다. 한 치 앞조차 보기 어렵고 추위는 뼈를 파고든다. 설원에서 우연히 조우해 동행하게 된 워렌(새무얼 잭슨)과 루스(커트 러셀)는 현상범 사냥꾼이다. 북부군 대령 출신인 흑인 워렌은 얼어붙은 현상범의 시체를 옮기고 있고, ‘교수형 집행인’이란 별명을 지닌 루스는 악명 높은 살인범 도메르그(제니퍼 제이슨 리)를 이송 중이다.
둘은 눈폭풍을 피해 잡화점과 식당을 겸한 한 간이숙박업소에 머문다. 먼저 온 손님들과 통성명을 나누다 보니 공기가 심상치 않다. 모든 손님들의 행선지는 레드락이라는 소도시. 매닉스라는 남부군 출신 사내는 레드락의 보안관으로 부임하는 길이다. 냉정하면서도 단정한 얼굴이 인상적인 모브레이(팀 로스)는 레드락의 교수형 집행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저 노모가 보고 싶어 고향으로 간다는 카우보이 사내는 얼굴에 불량기가 가득하다. 남부군 장군 출신인 노인만이 그나마 덜 위험해 보일 뿐. 손님들 모두 뭔가를 숨긴 표정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도메르그의 얼굴에 슬며시 화색이 돈다.
영화 ‘헤이트풀8’은 연극을 떠올리게 한다. 서부극이지만 전형성을 거부한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광활한 대지를 내달리는 호쾌한 사나이들의 모습은 없다. 드넓은 초원대신 좁은 숙박업소의 홀이 주무대다. 백인과 인디언의 ‘문명 충돌’도 없고 손가락으로 권총을 돌리는 멋진 총잡이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숙박업소 안을 무대로 여러 인물들이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견제하다 갈등을 만들어낸다. 돈에 굶주리고 피비린내에 절은 인간군상들의 다툼이 상영시간 대부분을 지배한다. 호쾌한 서부극에 익숙한 대중들은 낯설 수 밖에. 상업적으로 불리한 설정이다. 하지만 이 영화, 관객의 심장을 움켜쥐며 168분을 이어간다. 영화의 중심인물인 워렌과 관객이 모르는 음모를 조금씩 보여주며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 저예산영화 ‘저수지의 개들’(1992)로 데뷔해 할리우드를 놀라게 하고 두 번째 영화 ‘펄프픽션’(1994)으로 칸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이 감독은 시들지 않은 영화적 재능을 이번에도 스크린에 펼쳐낸다. 북부군 출신과 남부군 출신의 신경전, 흑인과 백인의 갈등을 섞으며 폐쇄된 공간에서 기묘한 긴장감과 극적 폭발력을 빚어낸다. 장르의 틀을 빌려오면서 장르의 전형성에 안주하지 않는 타란티노의 연출 방식은 여전하다. 차가운 유머와 거침 없이 표현되는 신체 훼손 장면이 그의 인장 역할을 한다.
영화는 타란티노의 전작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의 연장선상에 있다. 노예였다가 해방된 현상범 사냥꾼 장고(제이미 폭스)가 흑인 노예를 착취하는 백인 농장주를 단죄하는 내용을 담았던 전작처럼 흑인 주인공을 앞세운다. 흑백 갈등을 영화의 주요 소재로 삼으면서 영화가 표현해낼 수 있는 정치적 올바름을 제시하는 점도 닮았다. 법에 의한 진정한 정의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피부 색깔과 정치적 노선에 연연치 않아야 한다고, 진정한 강국 미국의 건설은 이런 불편부당한 정의 실천에 있는 것이라고 영화는 결론에서 역설한다. 멀티플렉스체인 CGV에서만 상영한다. 1월7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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