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11월 23일 아침 리영희(1929~2010)는 서울 변두리의 허름한 동네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다 말고 갑자기 들이닥친 공안당국자에 의해 연행되었다. ‘8억인과의 대화’를 통해 당시에는 적대 국가로 간주되던 중국 사회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깊이 탐구했다는 이유였다. 그는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여러 날 취조를 받았다. 당국은 그에게 중국 공산당을 ‘고무 찬양’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리영희가 반공법으로 기소되던 날, 그의 모친은 세상을 떴다. 죄수 아닌 죄수 신분이라 그는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
평생 그는 총 5차례에 걸쳐 수감되어 1,012일을 감옥에서 지냈다. 1969년부터 그와 독재정권의 불화가 본격화되었다. 당시 리영희는 ‘조선일보’ 기자로 베트남전쟁을 취재하다가 숨겨진 진실을 발견했다. 알려진 것과 달리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의도적으로 일으켰고,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언론을 통제하고 갖은 음모를 꾸몄다는 것을 알게 됐다. 리영희는 지나친 친미주의를 경고했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도 반대했다. 이 일로 그는 신문사에서 쫓겨나 합동통신사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날로 커가는 독재 권력의 횡포를 좌시할 수 없어 ‘64인 지식인 선언’에 서명하였다. 그 바람에 1971년 또 해직되었다. 이후 리영희는 잠시 대학교수가 되기도 하였지만 오래지 않아 거기서도 설 자리를 잃었다. 1989년까지 그에게는 해직과 투옥이 밀물과 썰물처럼 교대로 되풀이되었다.
국가ㆍ민족보다 중요한 건 ‘진실’
20세기의 한국사회에는 광풍이 휘몰아쳤다. 리영희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야만의 시대’였다. 그와 같이 양심을 지키며 소신껏 살고자 했던 지식인들에게는 끝없는 고난의 행렬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엄혹했던 시대에 나는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책임으로서, 그리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서 싸우는 고결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돕기 위해서, 많은 글을 썼고 많은 발언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서 나에게 가해지는 고뇌와 불이익은 말할 수 없이 혹독했다.” 훗날 노경의 리영희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반추했다.
한동안 우리는 지긋지긋한 그 야만의 세월이 끝난 줄로 믿었다. 그러나 최근의 여러 사태를 겪으면서, 민주주의는 아직도 요원한 꿈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언젠가 리영희는 짧고 힘찬 어조로 자신의 신조를 밝힌 적이 있다. “내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야. 민족 같은 것이 아니야.”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진실이야.” 이로써 그는 국가나 민족의 가치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제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진실의 토대 위에 바로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신을 드러낸 말이다.
언론인으로서 그는 한 시대를 휩쓰는 이념과 현란한 정치적 수사의 장막에 숨겨진 추악한 위선과 허위가 적지 않음을 인식하고 경악했다. 그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작업은 극히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진실의 힘이 아니라면 과연 어떻게 권력의 독주와 횡포를 막을 수 있겠는가?
우상에 도전하지 않고 발전 없다
“나의 글을 쓰는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우상과 이성’(1977)의 서문에서 리영희는 자신의 외로운 결심을 그렇게 선언하였다. 그런데 그가 진실을 탐구하는 방식은 특별했다. 그는 절대로 이름난 학자의 이론에 기대지 않았다. 권력자의 시녀나 다름없는 주류 언론매체를 추종하거나 모방하지도 않았다. 그가 믿은 것은 오직 자신의 양심과 이성뿐이었다.
그는 학창시절 이공계 교육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터득한 진실 탐구의 방법이 하나 있었다. 절대로 외부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판단하는 것, 되도록 많은 정보를 수집하여 치밀하게 분석하고 이를 자력으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리영희식 진실 탐구는 ‘리영희적 세계관’을 탄생시켰다. 어떤 주제를 다루든 간에 그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권위 있는 정치학자나 사회학자의 이론과도 거리가 멀고, 공산주의자들의 선전과도 다른 비판적 현실인식에 도달했다.
그의 펜 끝에서 나온 기사와 논평들은 한국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은 시민 위에 군림하며, 국가의 모든 현안에 멋대로 정답과 오답을 결정하고 주입하려 든다. 권위주의의 민낯이다. 이른바 주류 지식인들은 앵무새처럼 권력의 들러리를 자임하기 일쑤다. 그들의 거짓과 횡포에 맞서 리영희는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토대로 사물에 관한 냉엄한 인식을 촉구했다. 연달아 그는 지배층의 비리와 모순을 폭로했고, 맹목적 반공친미주의와 이른바 한미일 삼각동맹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생각’ 불어넣는 ‘의식화’의 원흉
권력의 핍박은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리영희의 대중적 인기는 날로 높아갔다. 1980년대 초반 공안 당국은 비밀리에 대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30권의 책자를 조사했다. 놀랍게도 1위는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2위도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였다. 3위는 송건호의 ‘한국 민족주의 탐구’, 4위는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이었고, 5위는 다시 리영희의 ‘우상과 이성’이었다. 리영희의 비판적 세계관이야말로 독재 체제의 존립 근거를 무너뜨리는 가공할 무기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권력자들은 리영희를 가리켜 “지식인, 대학생과 대중의 머릿속에 ‘생각’을 불어넣는 ‘의식화의 원흉’”이라 매도하였다. 그들은 이미 진즉부터 리영희의 저술을 금서목록에 포함시켰지만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1970, 80년대 대학가에서는 누구나 리영희를 즐겨 읽었고, 거기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책들은 이른바 ‘의식화’의 교과서였다. 리영희의 책을 읽고 많은 청년들이 그 동안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온 자신들의 과거를 반성했다. 리영희의 저술은 그들 자신이 한국 사람임을 알게 하며, 지식인의 사명을 느끼고, 시대의 아픔을 똑바로 보게 하였다. 요컨대 그의 책은 우리 현실의 남루함을 깨닫게 하는 각성제였다. 강준만은 그 점을 요령 있게 서술한 적이 있다. “멀쩡하던 대학생들이 리영희의 책만 읽으면 충격을 받고 이상하게 변해갔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공부에만 몰두하겠다던 ‘청운의 꿈’을 내던지고, 진실과 인권과 상식의 가치에 입각해 이 사회와 나라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 말처럼 리영희에게는 청년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놀라운 힘이 있었다. 그의 저술은 새 세상을 약속하는 명징한 언어로 가득한 백과사전이었고, 거역하지 못할 양심의 명령이었다.
냉전 극복, 평화통일 문제의식 현재진행형
시대의 조류에 부응해 리영희의 문제의식도 변화를 거듭하였다. 주로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모색했던 것이지만, 제3세계 문제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노년에는 사회주의 및 자본주의의 공존과 균형을 촉구하며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1994)를 펴냈다.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등장하자 진보지식인들이 앞 다퉈 정치 전면에 나섰다. 리영희는 달랐다. 한 자리를 꿰차고 현실에 안주하는 대신, 그는 재야에 남아 끝까지 정권을 감시하고 철저히 비판하였다. 리영희라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진보적 지식인들은 ‘사상의 은사’로 평가했고, 독재 권력은 ‘의식화의 원흉’이라 매도하던 리영희는 우리 곁을 떠난 지 오래다. 그렇지만 냉전적 사고를 극복하고 평화통일의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그가 풀지 못한 숙제는 그대로 남아있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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