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 갈등이 격화하고 있다. 수니파 맏형인 사우디아라비아가 2일 자국 내 유력 시아파 성직자를 처형하자, 시아파 종주국 이란이 보복을 다짐하는 가운데 테헤란의 시위대가 사우디 대사관을 방화했다. 시리아와 예멘 등에서 중동의 패권경쟁을 벌여오던 양국의 갈등이 직접 충돌로 비화하는 양상이다.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에 따르면 사우디 정부는 이날 테러 혐의로 시아파 성직자인 셰이크 님르 알님르(56) 등 47명을 처형했다. 알님르는 사우디 정부의 시아파 차별과 왕조의 독재에 비판적 인물로 중동에 민주화 열기가 불던 ‘아랍의 봄’ 시절에는 사우디 내 시아파의 저항을 이끌었다. 이란 정부는 자국 내에서 차지하는 그의 상징적인 의미를 감안해 그간 사우디에 수 차례 석방을 요청해왔다. 하지만 사우디 정부는 2014년 말 사형을 선고했고 약 1년 만인 이날 참수했다.
사우디 정부는 이날 처형과 관련해 “반국가적 행위를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란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가 직접 나서 3일 “사우디 정치인들은 신의 복수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NYT는 중동전문가들의 발언을 인용해 “알님르를 테러용의자에 포함해 처형한 것은 작게는 자국 내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경고였고 크게는 중동에서 패권경쟁을 벌이고 있는 이란에 대한 견제였다”고 해석했다. 이날 처형된 이들 대부분이 10년 전 사우디에서 벌어진 테러에 연루된 이슬람 무장조직 알카에다 조직원이었던 것에 반해 알님르는 2012년 7월 민주화 시위 도중 경찰에 저항하다 체포된 것이어서 이들을 함께 묶어 테러 혐의로 처형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풍부한 유전 지대인 사우디 동부에 시아파가 많이 사는데 차별 철폐 등을 주장하는 이들의 반 정부 시위가 확산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하다.
사우디 정부의 처형에 성난 이란 시민들은 이날 수도 테헤란에 위치한 사우디 대사관으로 몰려가 건물을 점거한 다음 불을 질렀다. 현장에 있던 목격자는 “시위대들이 대사관으로 들어가 집기를 부수고 대사가 쓰는 침실에 불을 놓았다”고 NYT에 말했다. 당시 이란 시위대는 대사관을 공격하기 전에 “사우디 왕가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 제2의 도시 마슈하드의 사우디 총영사관도 이란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이란 당국은 항의 시위 도중 사우디 대사관에 침입해 화염병을 던져 불을 지른 혐의로 40명을 검거했다.
양국 정부간 긴장도 고조되고 있다. 이란 정부는 사우디 대사를 불러 “사우디 정부의 무책임한 정책이 이번 처형을 가능하게 했다”며 “이러한 정책을 지속하면 사우디 정부는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우디 정부도 이란 대사를 불러 “자국 내정에 뻔뻔하게 간섭하지 말라”고 비판한 후 “이란 정부는 사우디 대사관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고 역공세를 펼쳤다. 사우디 정부는 3일 별도 성명까지 내고 “이란이 테러리즘을 지원한다는 민낯을 드러냈다. 이란은 중동 테러리스트의 파트너”라고 역공했다.
사우디와 이란이 이슬람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 격퇴를 목표로 오랜 만에 화해 분위기에 접어들 수 있다는 기대도 나왔지만 이번 사건으로 화해는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란 정부가 이번 처형에 대한 보복으로 자국 내 감금돼 있는 수니파 성직자를 조만간 대거 처형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국제사회는 일제히 우려를 표명했다. 미국 국무부 존 커비 대변인은 이날 “종파 갈등이 감소해야 할 시기임에도 알님르 처형으로 갈등이 악화할 수 있음을 특히 우려한다”며 “사우디는 긴장 완화를 위해 모든 공동체 지도자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페데리카 모게리니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알님르 처형은 이미 중동 전체에 큰 피해를 입힌 종파 갈등을 더욱 키우고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밝혔으며 독일 외무부도 “중동의 커지는 갈등과 깊어지는 균열에 대한 우리의 우려가 더욱 강해졌다”고 사우디에 유감을 표명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대변인 성명에서 사우디의 집단 사형에 유감을 표하고 이란 시위대에는 자제를 촉구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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