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공원은 제염 시설물로 전락
방사능 수치 여전히 최고 수준
골격만 남은 고층 건물 꼭대기엔
마치 죽어버린 도시 비웃는 듯
‘핵은 군인 아닌 노동자에게’ 문구
“그날은 2교시 수업을 하다 말고 선생님들이 다른 방에 모여 긴 회의를 가졌어요. 교실로 돌아온 선생님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지요. 창밖에 앰뷸런스 소리가 요란했지만 일찍 집에 간다는 게 마냥 신났어요. 나가보니 수십 대의 앰뷸런스와 버스들이 도로를 메우고 있었고 ‘발전소에 불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친구들과 한달음에 동네 다리로 달려가 구경했어요. 발전소가 멀리 내다보였거든요.”
알렉산더 시로타(40)씨는 한쪽 벽이 무너진 채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는 모교 앞에서 30년 전 그날을 생생하게 술회했다.
시로타씨는 소련 인민예술가 신분이던 어머니를 따라1983년부터 프리피야트에서 살았다. 프리피야트는 당시 유럽 최대 원전이었던 체르노빌 발전소의 노동자들을 위해 인근에 건설된 최첨단 계획도시였다. 숲으로 둘러싸인 자연경관에 수영과 유도, 펜싱 등을 즐길 수 있는 스포츠센터, 카트를 끌며 쇼핑하는 대형 수퍼마켓, 컨베이어벨트를 활용해 서빙하는 카페까지, 삶의 질은 소련 내 어느 도시보다도 높았다. “꿈의 도시였어요. 거주자 평균 연령이 겨우 26세였고 아이들이 넘쳐나는 젊은 도시였죠. 키예프 사람들도 부러워했지만 그때는 이주의 자유가 없었으니까.”
체르노빌 사고는 이 꿈의 도시를 순식간에 유령 도시로 바꾸어놓았다. 사고 후 하루 이틀 새 1,300여대의 버스에 실려 피난길에 오른 4만 8,000여명의 주민들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이젠 나무와 잡풀만 무성하지만, 곳곳의 잔재들은 그때의 영화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대단지 고층아파트들은 단단히 버티고 서 있었다.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문화복합센터 ‘에너제틱’에서는 영화관과 도서관, 공연장 등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었다. 빛 바랜 필름더미와 악보가 바닥을 뒹굴었고, 공산주의 체제를 홍보하던 책들은 시대를 잊은 채 서가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디스코볼의 눈부신 빛을 받아내던 원색 벽화는 군데군데 시멘트벽을 드러내고 있었다.
골격만 남은 건물들로 을씨년스러운 프리피야트는 전쟁 폐허와 닮아 있다. 다른 게 있다면 3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 2시간 남짓 이 도시를 걷는 동안에도 방사선 계측기는 시도 때도 없이 ‘삐비비빅’ 소리를 냈다.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방사선 수치가 높은 이른바 ‘핫 스팟’이 곳곳에 존재한다는 의미다. 숲이 우거졌거나 이끼가 있는 곳, 물웅덩이와 같은 곳은 특히 그 수치가 높았다.
1.12μsv/h. 놀이공원 입구에 도착하자 갑자기 계측기가 시끄럽게 울려댔다. 서울보다 10배가 넘는 수치. 녹슨 고철 덩어리로 남은 대관람차와 범퍼카를 지나는 동안 수치는 0.8~0.9 μsv/h로 오르락내리락 반복했다. 바닥에 몇 초 갖다 댔을 뿐인데 무려 37 μsv/h를 가리키는 곳도 있었다.
“그 해 5월 1일 노동절에 정식 개장을 앞두고 있었어요. 운전을 하고 싶었던 저는 범퍼카 탈 날만 손꼽아 기다렸죠. 하지만 이 놀이공원은 아이들을 제대로 맞아보지도 못하고 제염에 동원된 헬리콥터 착륙장으로 전락하고 말았어요. 당시 발전소까지 날아갔다 온 헬리콥터가 매일 이착륙했으니, 지금까지도 방사선 수치가 높은 게 당연하죠. 나중에는 제염 트럭들의 주차장으로도 쓰였어요.” 시로타씨는 말했다.
발전소에서 2㎞ 남짓 떨어진 그의 집도 핫 스팟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사고 당시 프리피야트에서 가장 방사능 오염이 심각한 구역이었다던 이곳의 방사선 수치는 0.84 μsv/h를 가리켰다. 아파트 입구로 향하는 길은 잡풀이 무성해 그가 앞장서지 않고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날 저녁까지 프리피야트 강둑에서 전쟁놀이를 했어요. 이 구역만 해도 방사선 농도가 시간당5~6rem(5만~6만μsv)에 달했다고 해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리 없는 개구쟁이들은 발전소를 오가는 트럭들이 지나간 길, 물웅덩이를 첨벙거리고 다녔어요. 대피 버스를 타면서도 신나는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어요.” 시로타씨는 이어 벽지조차 남지 않은 텅 빈 방에 서서, 이 방과 어머니에 얽힌 재미난 추억을 한참 늘어놓았다. 결코 돌아오지 않을 시절의 이야기들이었다.
프리피야트 한가운데 위치한 거대한 건물 꼭대기에는 ‘핵을 군인이 아닌 노동자에게’라고 적힌 메시지가 한 글자도 훼손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평화적인 핵 사용을 강조하고 있는 이 선전 문구는 일찍이 죽어버린 도시를 비웃고 있었다.
사고 뒤 키예프로 이주해 살던 시로타씨는 1994년 처음 프리피야트 땅을 밟은 뒤 수백 회 이곳을 다녀갔다. 잊지도 잊히지도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텅 빈 도시의 우편함을 뒤져가며 프리피야트 지도를 만들었고, 영상 사진 등 관련 자료들을 모았다. 그리고 2004년 비영리기구인 ‘프리피야트닷컴’(Pripyat.com)을 창설했다.
체르노빌=김혜경 프리랜서기자 salutkyeong@gmail.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