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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주의 유유자적] 산촌의 겨우살이

입력
2016.01.08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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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왔지만 산골생활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우습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 노래방에 가서 굳이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노래 시켜놓고 한 소절도 끝나기 전 금방 옆 사람과 하던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리곤 박수를 치고 또 다음 사람을 시켜놓고 하던 짓을 계속한다. 설렘과 떨림과 쑥스러움으로 시작되는 모든 ‘첫’은 그렇게 잊혀지고 우리는 늘 하던 대로 한다.

시간이라는 것을 무 자르듯 토막쳐놓고 자, 여기가 끝이고 여기부터가 처음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냥 어제 해오던 것을 오늘 하는 것이고 오늘 다 하지 못한 것을 내일 이어가는 게 생활일 것이다. 그렇지만 원고지 몇 장을 써놓고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고는 덧대고 지우고 이어가는 것처럼 생활의 한 길목에서 걸머지고 가던 바랑을 내려놓고 도대체 내가 무엇을 지고 이렇게 허덕이며 가는가 속을 헤집어보는 시간이 연말이고 연초가 아닌가 생각한다. 버릴 것투성이인 그 속에 그래도 소중한 것은 역시 사람이다.

지금은 사라진 풍속이 되었지만 이맘때면 청색 페인트가 벗겨진 철문에 세로로 뚫려있는 우편함에는 몇 통의 연하장이 들어있곤 했다. 거기에는 캠퍼스를 찾아다니던 문학전집 외판원의 이름도 있고 나이트크럽 웨이터 조용필과 크리스마스카드를 빼먹은 고향친구의 이름도 있다. 달을 뚫고 날아가는 학이 금박된 촌스럽고 형식적인 작은 봉투 속에는 그래도 너와 내가 한 생을 건너가는 인연으로 맺어져 있음을 확인하는 따듯함과 수줍음이 있었다.

이제는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온 내 우편함에도 몇 통의 연하장이 들어있다. 그런데 대부분은 몇 줄 적어놓고 알고 있는 모든 번호의 키를 누른 일괄 엽서다. 제가 무슨 군수도 아니고 면장도 아닌데 지역구민 대하듯이 보내면 답장을 기다린다는 것인지 그런 줄 알라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많은 나는 개별 답장을 원칙으로 한다. 하나의 문장을 완성하는 동안만이라도 그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고 싶은 것이다.

아침을 먹으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아내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요즘은 문자 메세지도 윗사람이 먼저 보내는 게 대세래요” 퇴원하신 강 선생님이 제자들의 안부를 먼저 묻더란다. 밥숟갈을 놓고 스마트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커피를 한 잔 마시며 그분을 생각했다. 그리곤 더듬더듬 자판을 누른다. “한 귀현님께! 선생님, 새해에는 제가 철 좀 들어 절대로 술 먹고 불쑥불쑥 전화하지 않을게요. 전번에 영상통화를 끊지 못하고 화장실까지 가시게 해서 죄송해 죽겠어요” 곧 답장이 왔다. “ 시인이 너무 철들면 시 못써요” 나는 내가 왜 그분을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렇게 아침나절을 관념적으로 보내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마당 화덕에 걸어놓은 가마솥 뚜껑에 하얗게 내려앉은 서리가 녹았다. 삭정이에 불을 붙이고 장작을 얹어놓는다. 엊저녁에 불려놓은 콩을 한 솥 가득 넣고 불가에 앉아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본다. 지지직거리며 제 몸의 물기를 짜내고 불꽃의 깃발로 사라져가는 저 소멸이 딱딱한 콩을 부드러운 된장으로 만들어놓는다.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흘러넘치는 솥뚜껑을 열어젖힌다. 구수하고 풍요로운 냄새의 안개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나무주걱으로 열심히 콩을 뒤집는다.

커다란 함지박 속에서 아내와 나는 궁둥이를 부딪치며 뻘밭을 뒤지는 어부처럼 콩을 밟았다. 내가 뽕짝을 부르면 아내는 동요를 불렀다. 이렇게 열여덟 덩이의 메주가 거실바닥에 대견하게 깔려있고 시루 속에든 청국장이 담요를 덮어쓰고 깊은 잠을 청했다. 우리 방은 점점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방으로 변해간다. 퀴퀴한 냄새가 나고 무말랭이, 고춧잎, 대추들이 마룻바닥에 들어앉는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추추추추 물 떨어지는 소리가 어릴 때 요강에 떨어지는 오줌소리 같다. 아내는 메주가 마르면 두부를 쑨다고 의기양양이다. 이러다 ‘동지섣달 긴긴 밤’에 맷돌을 돌릴 판이다.

눈보라 휘돌아간 밤/ 얼룩진 벽에 / 한참이나 / 맷돌 가는 소리/ 고산식물처럼 / 늙으신 어머니가 돌리시던/ 오리 오리/ 맷돌 가는 소리. - 雪夜-

박용래 시인의 그리운 詩 한편과 함께 아득하게 봉화산골의 밤이 온다. 검은 하늘에 뭇별이 총총 떠올라 창밖에서 기웃거린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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