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선 비대면 본인 확인 허용돼
신분증 촬영 등 통해 간단히 개설
지점 발급 땐 대포통장 우려해
재직증명서 요구 등 까다로운 절차
대학생 등 무직자엔 ‘통장 고시’
노년층 차별, 정책 엇박자 논란
20대 대학생 김모씨는 최근 계좌를 새로 만들기 위해 A은행 명동지점을 방문했지만 30분만에 포기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은행 직원은 사용목적이 분명하지 않고 소득이 없는 데다 주민등록상 주소지가 대전이라는 점 등을 지적하며 “대포통장 문제로 요즘엔 은행측이 계좌 개설을 거부할 수 있는 의무가 있다”고 했다.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자 학생증과 기숙사 출입증 등 현 거주지 증명을 요구하는가 하면, 과거 거주지와 사용하는 통신사 등을 묻는 기습 질문을 통해 본인 확인을 거듭했다. 김씨는 “계좌 개설을 포기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내 통장을 내 마음대로 개설하지 못한다는 게 납득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씨는 며칠 뒤 불과 5분 만에 A은행의 계좌 개설에 성공했다. 새로 출시된 모바일 앱을 통해 신분증을 촬영해 제출하고, 휴대전화 본인명의를 확인한 후 대학 입학 때 개설했던 B은행 계좌에서 확인전용계좌로 소액을 이체하는 단계를 거치자 계좌개설이 완료됐다.
은행들이 대포통장 근절을 이유로 신규계좌 발급절차를 갈수록 까다롭게 하면서 통장 만들기가 어려워진 소비자들의 불만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반면 온라인에서는 이와 반대로 쉽게 계좌를 개설할 수 있는 서비스를 내놓고 있어 정책 엇박자 논란이 일고 있다.
10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작년 5월 ‘계좌 개설 시 실명확인 방식 합리화 방안’을 발표한 데 이어 지난달부터 은행권에 비대면 본인 확인을 공식 허용했다.
▦신분증 촬영 또는 스캔 사본 제시 ▦영상통화로 신분증 사진과 얼굴 대조 ▦현금카드 등 우편 전달 시 고객 확인 ▦기존계좌에서 신규 계좌로의 소액 이체 중 두 가지 이상을 중복 사용하면 은행 창구를 방문하지 않고도 계좌를 개설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이에 따라 신한은행과 우리은행, 기업은행이 모바일 앱을 통한 비대면 본인 확인 방식의 계좌 개설이 가능한 서비스를 내놓았고, KEB하나은행과 국민은행 등도 이달 중 실시할 방침이다.
하지만 이런 흐름과는 달리 은행 지점에서의 계좌 개설은 갈수록 까다로워지는 추세다. 은행들은 지난해부터 금융거래목적확인서 작성을 의무화하고, 재직증명서 사업자등록증 등의 증빙서류를 가져와야 신규 통장을 발급해주는 등 계좌 개설 요건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한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한 후 다른 은행에서 계좌를 또 만들려고 하는 경우 ‘단기간다계좌’에 걸려 최소 1~2달 후에나 개설이 가능하다. 무직자의 경우 ‘통장 만들기가 고시만큼 어렵다’는 뜻으로 ‘통장 고시(考試)’란 말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은행들의 계좌개설 기준은 금융당국 지침이나 은행연합회 차원의 가이드라인이 아닌 은행들이 자율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규정이다. 그럼에도 앞다퉈 통장 발급 기준을 강화하고 있는 것은 대포통장 발급 건수가 늘어날 경우 금융당국의 제재를 받을 수 있고, 은행 이미지도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 때문에 금융당국의 엇갈린 정책 방향이 금융 현장의 혼선을 초래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개혁의 핵심 과제인 핀테크 활성화를 위해 비대면 채널 확대를 추진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대포 통장 근절을 위해 계좌 개설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비대면 거래 관련 서비스를 내놓지 않은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핀테크 관련한 가시적인 성과를 이른 시일 내에 보여주기 위해 은행들에 서비스 출시를 독려하면서도 비대면 인증에 대해 대면거래와 동일한 수준의 감독 규정을 적용하는 건 문제“라며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온라인 이용이 익숙하지 않은 소비자에게 차별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작년부터 계좌 개설 절차가 너무 까다롭다는 소비자들의 민원이 많았는데 비대면 채널 활성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온라인에서만 기준이 대폭 완화되고 있다”며 “같은 은행인데도 지점과 온라인의 통장 발급 기준이 다른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유환구기자 redsun@hankookilbo.com
오주환 인턴기자 (서강대 신문방송학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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