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혼 포기자’였다”
“그래서 정확히 얼마까지 할 수 있는데?”
지난해 1월1일부터 사귀기 시작해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최성욱(33)ㆍ서영은(31)씨 커플은, 막상 결혼 얘기가 나오면 민감해진다. 6월쯤부터 암묵적으로 결혼을 전제한 만남을 해 오던 이 커플이 입 밖으로 결혼 얘기를 꺼내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서씨가 답답한 마음에 결혼 구상을 물어보면 최씨는 두루뭉술 넘겨버렸기 때문이다.
최씨도 맘이 편치 않았지만, 그렇게 순간을 모면하는 게 그나마 최선이었다. 한부모 가정에서 어렵게 자란 최씨에게 어머니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는다는 건 언감생심이다. 성장 환경 탓에 단란한 가정에 대한 욕구는 더 강했지만 매번 돈이 발목을 잡았다. 최씨는 “서른 전에 어떻게든 학자금 대출 다 갚고 돈을 모으기 시작하면 마흔쯤 돼서야 결혼 밑천을 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며 “하지만 어떤 여자가 내 상황을 감수하고 10년 가까이 기다려 줄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또 “경제적으로 힘든 와중에 꾸역꾸역 결혼이란 걸 하면 더 불행할 것 같았다”며 “삶이 돈에 매몰되고, 도움 받은 어느 한 쪽 집에 미안해하며 죄인처럼 사느니 차라리 결혼을 포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청년들이 경제적 문제로 결혼을 포기하는 건 어제오늘 얘기도, 최씨만의 얘기도 아니다. 2012년 한국소비자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남성의 40.4%, 여성이 19.6%가 경제적 이유 때문에 결혼하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최씨는 “지금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친구를 만났지만, 결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붙들고 있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차일피일 얘기를 미룬 것도 “모아둔 돈이 한 푼도 없다고 얘기하면 여자친구가 떠날까 봐 차마 얘기하지 못했다”며 “내가 아무리 돈이 없다고 해도 떠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생겼을 때 고해성사하듯 얘기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왜 그들은 모은 돈이 없을까?
최씨가 서씨의 답답증에 “이래저래 1,000만원쯤 준비할 수 있다”고 화답을 한 건 두 달 전쯤이다. 서씨는 “연애할 때 ‘이렇게 돈이 없을 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어렵게 만났지만,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했다. 30대 초반인 그들에겐 왜 결혼 자금도, 하물며 연애할 돈도 없었을까? 서씨는 “결코 우리가 게으르게 살았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들이 처음 만났을 때 최씨는 6년째 이어오던 기자생활을 접고 대안언론을 꾸려가고 있었고, 바리스타 경력을 갖고 있는 서씨는 워킹 홀리데이로 호주에서 지내다 막 국내에 들어온 참이었다. 서씨가 최씨의 대안언론에 필진으로 참여하며 인연이 닿았다.
서씨는 “호주에선 아르바이트 하면 1시간 시급이 1만7,000원 정도라 밥 한끼 먹고, 커피 한잔 마셔도 남지만 한국은 한끼가 채 안 된다”며 “이렇게 무력감에 빠져 지낼 바에야, 열심히 일 해서 회사 배만 불려줄 바에야 우리가 하고 싶은 일하면서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문화 혹은 커뮤니티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지역 커뮤니티에 기반한 재능기부를 대안언론의 수익 모델로 삼았었다. 하지만 맨 주먹으로 뛰어든 그들에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모아뒀던 종잣돈은 사라지고 빚만 남았다.
서씨는 “나는 바리스타로 7년 경력이 있고 오빠는 기자 6년 경력이 있으니 지금은 돈이 없어도 매달 200만원씩 모아 나가면 빚도 갚고, 남들처럼 결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며 “하지만 그 와중에 몸이 아파 병원비 지출이 생기는 등 돈이 모이지 않고, 알아 볼수록 터무니없는 결혼 자금에 맥이 빠졌다”고 했다.
“연애와 결혼은 가난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서씨는 지금까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묻는 질문에 “몇 달 전 정말 오랜만에 함께 스파게티를 먹었을 때”를 떠올렸다. 어떻게든 대안언론에서 길을 찾아보려 안간힘을 쓸 당시, 돈이 없어 연애를 포기하려고까지 생각했던 이들에게 스파게티는 사치였다. 메뉴선택은 가격이 결정했고, 먹는 것조차 줄여야 되니 가난은 피부에 와 닿았다. 스스로 불쌍해지고, 위축되고, 서러웠다. 가난에 지쳐 각자 재취업을 선택했고, 연애 후 처음으로 스파게티를 먹던 날이었다.
“몇 개월 만에 처음 먹었어요. 우리도 이제 이런 걸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죠. 예전 같았으면 별 거 아닌 일상이지만,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것 같아 정말 행복했어요.” 서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울먹였다. 하지만 그 울음 속에 섞여 있을 묘한 감정들 속엔 또 다시 닥친 현실의 벽에 대한 야속함도 녹아있었을 터.
스스로 세상물정에 어두웠다고 밝힌 서씨는 “주변에 결혼했거나 준비하고 있는 친구들 보면, 20대 후반에 남자가 마련해 온 4억짜리 전셋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던 그는 서울의 59㎡(18평) 아파트 전셋가가 평균 2억9,000만원이라는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돌이켜 보면 4억짜리 아파트를 구해오는 남자들도 평범한 회사원인 자기 돈이 아니라, 대기업 임원인 그들의 부모님 자산으로 집을 구한 금수저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웨딩컨설팅 업체인 듀오웨드가 신혼부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15년 결혼비용실태보고서’에 따르면 서울ㆍ수도권에서 결혼한 부부의 주택 비용은 1억8,089만원이었으며, 신랑은 평균 1억5,231만원, 신부는 8,567만원을 결혼비용으로 지출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최씨는 이런 현실에 좌절감을 느꼈다. 나아가 우리 일상 속에 만연해 있는 경제적 기준이 잘못 설정돼 있다고 토로했다. 사회에선 1,000만원 단위 차 바꾸는 걸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고 고급스러운 데이트와 해외여행도 당연한 일상처럼 얘기하는데, 스스로 결혼자금 모으면서 다 누리고 사는 게 대한민국 몇%에게 해당되는 삶인지 궁금하다는 것. 그는 “그런 삶이 평균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인식 속에서 내 노력은 보잘것없는 게 돼 버린다”고 말했다. 또 “학생 때는 비록 단칸방에 살더라도 공부든 운동이든 열심히 노력하면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결혼 앞에서 ‘노력’이나 ‘성취감’같은 단어는 배제되기 십상”이라며 “부모의 도움에 기대지 않고, 둘이서만 미래를 설계하는 분위기가 조성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희망은 소통에 있다
서씨는 “몇 평 이상 아파트, 얼마짜리 가구와 자동차 등 비상식적인 사회적 통념이 수많은 루저를 양산한다”면서 “청년들이 과거세대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해 솔직하게 소통하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부모에게 잠깐 도움을 받더라도 차용증을 써서 빌린 후 갚아 나가는 얘기, 정책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조언을 듣고 나니 지금 내게 닥친 문제가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그는 “‘너만 힘들고 포기하려는 게 아냐. 용기를 내’라는 메시지를 공유하고 나아가 결혼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정착시키려면 청년들 스스로 솔직해져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서씨는 경쟁이 안될 바에야 남들과 비교하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부터 행복을 찾기 시작했다. 마치 몇 달 만에 스파게티를 먹으면 행복했던 것처럼. “임대주택에 당첨되면 돈 모아서 넓혀가면 된다”며 “남들과 보폭이 다르더라도, 비록 작은 성취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거란 기대감이 생겼다”고 했다.
최씨는 세간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게 싫어 조촐하게 ‘작은 결혼식’을 치르고 싶다고 했다. “신부는 뭐 하는 사람이고, 신랑은 어떻고 하는 얘기들 때문에 행복해야 할 결혼식을 울적하게 만들고 싶진 않다”는 것. 자주 걸어 다녔던 터널에서 웨딩마치를 할까도 생각했다고 한다. 최씨는 “다들 아닌 척해도 다 거기서 거기”라며 “결혼 때문에 힘들어하는 청년들이 우리 얘기 듣고 힘내서, 사랑하는 연인만 바라보며 꿋꿋이 이겨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베이징=김경준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사진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이 기사는 한국일보 특별기획 ‘한중일 청년 리포트’의 일부입니다. ▦취업&창업 ▦주거 ▦결혼 ▦관계 등 총 네 가지 주제에 따라 각각 한국, 중국, 일본 청년들의 사례를 다루어 총 12편의 기사가 연재됩니다. 한국일보닷컴에서 전체 기사를 디지털 인터랙티브 형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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