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각자도생’을 진리로 만들었나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
KTX 여승무원들의 정규직 전환 요구에 대한 평범한 대학생의 반응이었다. 비단 학생 한 명의 생각이 아니라, 다수의 청년들이 공유하는 인식이다. ‘나는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 이 고생을 하는데, 그런 고생도 하지 않은 비정규직이 막무가내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게 오늘날 20대 대학생들의 생각인 것이다.
대학 강사인 오찬호씨가 2013년 출간한 저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소개한 이 사례는 청년들의 공감 능력이, 상생의 의지가 얼마나 희박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씨는 책의 머리말에서 “대학에서 만난 20대들은 살벌한 경쟁 자체를 모범적인 삶으로 이해한다”며 “이들은 경쟁우위를 점하기 위한 어떤 차별도 서슴지 않는 걸 공정하다고 여긴다”고 썼다.
2015년의 한국의 화두였던 ‘헬조선’과 친구처럼 붙어 다니는 말 중에 ‘망한 민족’과 ‘죽창’이라는 것이 있다. 망한 민족은 자기 비하와 함께 ‘유체이탈화법’이라 불리는 타자화된 현실인식이 묘하게 결합된 것이고, 죽창은 불평등이 팽배한 현실에서 유일하게 평등을 대변하는 아이콘이다. ‘죽창 앞에선 모두 평등하다’는 논리는 언뜻 연대 투쟁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이 못 나가는 건 내 잘못이 아니고, 현실이 팍팍할수록 내 살길을 찾는 게 진리’라는 각자도생의 가치에 매몰된 청년들에게 죽창의 가치는 그저 폭력적인 가십성 구호에 그칠 뿐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지난 가을 한 칼럼에서 아직도 연대하지 못하는 한국 청년들에 대해 “많은 청년들은 ‘헬조선 지옥도’를 그리면서도, 아직까지 각자의 노력이 문제를 풀어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며 “재벌경제가 아무리 수출을 잘 해도 다수의 삶이 나빠지기만 한다는 사실을 앞으로 몇 년간 더 확인해야 연대를 통한 사회 변화 외엔 살길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청년들이 스스로 이런 가치관을 만들어낸 것인지, 아니면 사회가 이런 가치관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다. 한 청년 연구가는 “한국 중국 일본 청년들이 각기 다른 가치관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건 사회가 설정한 가치와 분위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며 “청년 문제란 청년에게 문제가 있단 뜻이 아니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청년들에게 돌을 던지는 일은 사회의 책임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거친 후에 해도 늦지 않다는 뜻이다.
‘무중력’과 ‘유유자적’의 작지만 큰 차이
물론 모든 청년들이 각자도생의 극한 경쟁이란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건 아니다. 생존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감수하지만, 그 와중에 자기만의 삶의 속도를 유지하려 부단히 노력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인디 뮤지션들이 모여 만든 사회적 기업인 ‘유유자적 살롱’(유자살롱)은 탈학교 청소년들의 사회성 회복을 돕고 있다. 유자살롱의 공동대표인 이충한씨는 “한국 사회는 학교, 직장, 가정 등 어디 한 군데 마음 붙일 곳 없는 무중력 상태인 동시에 사회와 제도는 과도하게 간섭하고 무리할 정도의 노력을 요구하는 과중력 상태”라고 진단했다. 즉 극심한 사회적 압박의 반작용으로 무중력 사회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지향점은 적정한 중력장이 작용하는, 각자의 템포와 가치에 따라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사회에 있다. 그는 “탈학교 청소년을 포함한 니트ㆍ히키코모리와 능력자는 사실 한끗 차이”라며 “그들이 외롭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적절한 중력장을 만들어 주면 그들은 오히려 창의적인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적절한 중력장’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유자살롱은 바쁜 일상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직장인들이 함께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돕는 ‘직딩예대’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수료한 ‘이발사’(27ㆍ유자살롱에선 평등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이름 대신 별명을 쓴다)의 사례가 해법이 될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려고 교대에 진학한 건 맞지만, 대학 친구들은 임용고시라는 단 하나의 목표만을 추구하며 사는 것 같았어요. 전 그저 제가 마음 가는 대로 음악도 하고, 딴 생각도 하고 그렇게 살고 싶을 뿐이었는데, 대학 친구들은 그럴 때마다 ‘이번엔 또 쓸데없이 뭐하고 있니?’ 라고 여기는 것 같았어요. 자연히 전 교대에 다니는 내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죠.”
이발사는 외로웠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관계 속에서 외로움을 느낄 때 그가 찾은 돌파구는 또 다른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라는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찾아 나섰고, 유자살롱과도 그렇게 인연을 맺었다. 유자살롱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ㅇㅇ’이란 이름의 밴드도 만들었다.
“제게 제일 중요했던 건 그냥 제 마음을 알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거였어요. 그리고 운 좋게 ‘나도 그랬어’라고 얘기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 위안을 얻었죠.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숨 쉴 구멍이 생기니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더 좋아진 것 같아요.”
초등학교 교사인 이발사보다 훨씬 팍팍한 삶을 사는 청년들은 부지기수다. 이발사는 “그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사는 지 알기 때문에 위로나 조언은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의 끈만은 절대 놓지 않길 바랐다. 스스로를 옭아매는 관계가 아닌, 조금은 느슨하고, 완벽할 필요도 없는 관계. 그리고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 좋은 에너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그런 관계 말이다. 이발사가 그랬던 것처럼 무중력 상태에서 부유하는 청년이 스스로 유유자적하며 살 수 있게 만드는 힘은, ‘지나치지 않은 아주 작은 인력’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김경준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사진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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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한국일보 특별기획 ‘한중일 청년 리포트’의 일부입니다. ▦취업&창업 ▦주거 ▦결혼 ▦관계 등 총 네 가지 주제에 따라 각각 한국, 중국, 일본 청년들의 사례를 다루어 총 12편의 기사가 연재됩니다. 한국일보닷컴에서 전체 기사를 디지털 인터랙티브 형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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