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때 나란히 UEFA B 지도자 자격 취득
“한국에도 ‘찰 맛 나는 축구’ 전파할 것”
스페인 축구 명가 FC 바르셀로나의 시작은 평범했다. 그저 축구가 좋아서 모인 이들이 만든 클럽이었다. 1899년 스위스 FC바젤의 선수 출신 후안 감페르가 한 바르셀로나 지역신문에 축구팀을 만들고 싶다는 광고를 실어 선수 모집을 시작했고, 그로부터 한 달 뒤에 FC 바르셀로나가 창단됐다. 당시 특별했던 건 한가지였다. ‘클럽 그 이상(Mes que un club)’이라는 팀 모토다. 평범한 축구 클럽을 벗어나, 사회적 모범이 되는 존재를 지향하자는 그 뜻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축구 명장 조제 무리뉴(53)의 시작도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삼류였다고 말할 정도로 보잘것없는 선수시절을 보냈고 불과 24세에 은퇴를 택했다. 그러나‘지도자 무리뉴’는 달랐다. 유소년 클럽 등 낮은 곳에서부터 선수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진가를 증명해내기 시작했다. 29세 때 포르투갈 명문 스포르팅CP 수석코치에 임명된 뒤로 첼시(잉글랜드), 레알 마드리드(스페인)의 지휘봉을 잡으며 세계적 명장 반열에 오를 때까지 끊임없이 학습하고 분석했다.
여기 바르샤를 그리는, 무리뉴를 꿈꾸는 한국 청년들이 있다. 이들은 이른 시기에 선수생활을 접고 각각 영국과 독일에서 유럽축구연맹(UEFA) 지도자 자격을 얻어 착실히 자신의 목표를 키워가고 있다. ‘꿈을 나누는 팀’을 만들겠다며 국내서 STV FC(Share The Vison Football Club)를 창단한 문홍(25)씨와 독일서 선수와 지도자로 활동하며 석사과정까지 밟게 된 K리거 출신 송순보(30)씨를 만났다.
문홍 “‘클럽 그 이상’의 팀 만들겠다”
최근 ‘문홍’이란 이름이 축구계에 오르내린 건 여자축구 국가대표 전가을(28)의 미국여자프로축구리그(NWSL) 웨스턴 뉴욕 플래시 입단 소식이 전해지면서다. 문씨는 에이전트가 없는 전가을을 도와 영어 통역까지 맡아가며 여자축구 새 역사를 쓰는 데 일조했다. “수년 전 전가을 선수가 STV FC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메시지를 보내온 게 인연이 됐다”고 말한 그는 “이번 계약을 돕는 데 대한 대가는 전혀 없었다”고 했다. 영국 생활을 통해 쌓은 영어실력과 정보력을, 축구를 통한 보편적 행복을 위해 썼다는 거다.
그가 지난해 11월 창단한 STV FC의 모토 역시 마찬가지다. 팀이 축구인들에게 알려진 가장 큰 계기가 된 건 SNS 덕분이었다. 페이스북(▶ STV Football Club)에 축구 기술이나 전술을 이해하기 쉽게 전하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최근엔 구독자 4만 명을 넘겼다. 광고 한 번 없이 여느 프로팀 못지 않은 페이스북 팬을 얻게 된 비결에 대해 문씨는 “축구를 배우고 싶어하는 이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줬기 때문인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방향성 때문이었을까. STV FC의 선수모집 공고가 뜨자 전국에서 500여명의 지원자가 몰렸고 이 가운데는 제주도에서 날아온 이, 휴가 낸 현역 군인도 있었다. 축구선수의 꿈을 접었던 청춘들에게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지난해 화제를 모았던 KBS ‘청춘FC’와 비슷한 취지가 아니냐고 묻자 문씨의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한 때에 그치지 않는 지속적인 시도 라는 점, 그리고 비선수 출신도 선발될 수 있다는 점에서 명확히 다릅니다.”
송순보 “독일서 행복한 축구를 만났다”
프로선수 생활을 접고 유럽을 향했던 송순보씨는 새로운 축구 인생에 눈을 뜬 경우다. 국가대표 출신 양동현(30·포항) 등과 함께 뛴 서울 동명초등학교 시절, 한 해 무려 13개 대회를 석권하며 차범근 축구대상 우수선수상(1998년)을 타기도 했다. 그는 브라질 프로팀에 뛰던 2009년 K리그 포항스틸러스 파리아스 감독의 부름을 받아 K리그에 입성했다. 하지만 잦은 부상 등으로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한 채 스물넷이 되던 2010년 지도자 전향을 마음먹었다. 그의 눈은 유럽으로 향했다. 2011년 독일 5부리그 팀에 입단해 유럽축구의 맛을 본 그는 부지런히 언어를 익히고 지도자 연수를 받아 UEFA B 지도자 자격을 취득했다.
지도자로서의 꿈을 굳힌 그는 군생활도 지도자 경력을 쌓을 기회로 만들었다. 상무나 경찰청 입단이 불가능했던 그는 정보력을 총동원해 육군사관생도에게 축구를 가르치는 체육학 조교 자리를 찾아 들어갔고, 거기서 지도자로서의 소중한 경험을 쌓았다.
지난해 전역 후 다시 독일로 향한 그는 페어반트리가(독일 6부 리그)의 시메로데FC에 입단해 낮엔 소속팀과 독일 축구학교의 유소년팀(U-15) 감독으로, 저녁엔 선수로 경기장을 누볐다. 올해 4월부턴 ‘대학원생’신분도 추가된다. 최근 괴팅겐대학원 체육학 석사과정 합격을 통보 받아 입학을 결정했다는 그는 “독일에서 선수와 지도자로 뛰다 보니 한국에선 느끼지 못했던 ‘행복한 축구’가 보이기 시작했다”며 독일 축구를 더 깊숙이 파고들게 된 이유를 전했다.
“유럽서 배운 ‘찰 맛 나는 축구’ 가르칠 것”
20대 때 유럽에서 지도자 과정을 밟은 두 사람에게 한국과 유럽축구의 가장 큰 차이점을 묻자 “유럽 선수들은 안 맞고도 잘 한다”는 명료한 결론에 도달했다. 성적지상주의에 멍든 한국의 학원축구 시스템을 꼬집은 한마디였다. 그들은 유럽에서 배운 ‘찰 맛 나는 축구’로 한국 축구계에 작지만 큰 변화의 씨앗을 심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문씨가 이끄는 STV FC는 지난해 11월 열린 공개테스트 선발기준을 ‘잘 하는 선수’보다 ‘즐길 줄 아는 선수’에 뒀다. “6개월 내 K3 팀들과 대등한 경기력을 갖추고 2년 내에 유소년 클럽을 갖춰 FC바르셀로나의 초기 모델을 따르는 게 우선적 목표”라고 밝힌 문씨는 “축구에 대한 열정이 넘치지만 뛸 수 있는 기회를 못 찾았던 이들을 껴안고 싶다”며 “축구를 통해 한 번의 실패가 영원한 실패가 아님을 한국 사회에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송씨의 뜻도 다르지 않다. 송씨는 “독일 유소년 선수들을 가르치며 얻은 큰 깨우침은 선수들이 이기는 법을 먼저 배우보다 즐기는 법을 먼저 배운다는 것”이라며 “훗날 한국에 돌아온다면 성적 지상주의에 지친 유소년들을 보듬고 싶다”고 말했다. 무리뉴만큼 빠른 시간 내에 명장으로 인정받기보단 더디더라도 한국 유소년 선수들이 승리보다 더 큰 즐거움이 있다는 걸 익혀가며 성장하도록 돕겠다는 게 그의 목표다.
김형준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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