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서 첫 여성 총통이 나왔다. 중화권 국가에서 여성이 선거를 통해 최고 지도자로 뽑힌 것도 처음이다. 여성이 부모나 정치 집안 배경 없이 자수성가로 아시아 국가의 정상이 된 것도 처음이다.
16일 대만 선거관리위원회와 매체 등에 따르면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ㆍ60) 후보는 이날 치러진 총통 선거에서 모두 689만4,744표를 얻어 56.2%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국민당 주리룬(朱立倫) 후보는 381만3,365표로 31.0%의 득표율을 올리는 데 그쳤다. 친민당 쑹추위(宋楚瑜) 후보는 157만표(12.8%)를 얻었다. 국민당의 주리룬(朱立倫) 후보는 16일 밤7시(현지시간) 차이 후보와의 표 차이가 300만표 이상 벌어지자 국민당 당사 앞에 나와 “우리가 졌다”고 패배를 인정했다. 그는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국민당 주석직도 내 놨다. 차이 후보는 이날 밤8시30분 당선 확정 이후 첫 내외신 기자회견을 가졌다. 차이 당선자는 “모든 대만 인민에게 감사드린다”며 “우리는 대만에 불을 켰고 전 세계에 대만은 민주주의라는 사실을 행동으로 알렸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차이 후보는 대만 총통 선거에서 승리, 8년 만의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이날 선거는 영상 16∼18도의 맑은 날씨 속에 1만5,000여개 투표소에서 진행됐다. 차이 후보는 오전 9시40분 신베이(新北)시 융허(永和)구의 한 초등학교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한 표를 행사했다. 차이 후보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고 “김치도 좋아하느냐”고 다시 묻자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 “하오츠(好吃·맛있어요)”라고 답했다. 민진당 신문부 부주임은 “차이 후보는 간단한 한국말 인사를 알아들을 수 있고 한쥐(韓劇·한국드라마)도 무척 좋아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총통 선거는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총통 집권 8년 간 치솟은 집값과 경제 실정, 정체성을 잃은 친중 정책 등에 대한 반감으로 일찌감치 차이 후보의 승리가 점쳐졌다. 투표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더 국민당에게 참담했다.
이날 투표에선 입법위원(113명) 선거도 동시에 진행됐다. 지역구 의석 79석 중 민진당은 68석을 차지한 반면 국민은 35석에 그쳤다. 이는 민진당은 28석이나 늘어난 데 비해 국민당은 29석이나 줄어든 것이다. 국민당이 국회에서 다수당 지위를 놓친 것은 처음이다. 차이 당선자와 민진당의 권력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차이 당선자는 “정권이 교체된 건 세번째이지만 국회의 다수당이 바뀐 것은 처음”이라며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중화권에서 여성이 최고 지도자에 오른 사례는 당나라 고종의 황후 출신으로 15년간 황제 자리에 있었던 측천무후와 청나라 말기의 서태후를 제외하면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더구나 아시아 국가의 여성 지도자가 대부분 정치 집안 출신으로 집안의 후광을 얻은 데 비해 차이 당선자는 맨손으로 시작, 스스로의 힘으로 최고 지도자가 됐다. 민주적 절차로 여성이 국가 정상이 된 경우는 전 세계로 범위를 넓히면 이사벨 페론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1974~76년)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79~90년) 등이 있다. 현역 여성 지도자론 우리나라의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등이 꼽힌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은 오는 11월 미 대통령에 도전한다.
대만 독립 성향이 강한 민진당이 다시 집권함에 따라 양안(兩岸) 관계에 적잖은 변화가 일 것으로 보인다. 국민당 마잉주 총통은 집권 기간 중국과 무려 21개의 협정을 맺었다. 양안은 2010년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하고 지난해 11월엔 분단 이후 66년 만에 처음으로 양안 정상회담까지 했다. 그러나 민진당은 이러한 국민당의 친중 정책에 대해 반대해 왔다. 민진당은 또 중국이 내세우는 ‘하나의 중국’에 거부감이 크고 대만 경제가 중국에만 의존하는 것도 위험하단 입장이다. 이에 따라 양안 관계가 급속히 냉각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차이 당선자는 “현상을 유지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내 놨지만 ‘현상’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특히 차이 당선자가 미일과의 군사 협력 등을 강화할 경우 아시아 정세는 또 한번 격동칠 가능성이 높다. 다만 당장 급격한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대만은 이미 국내총생산(GDP)의 40%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안 교역 규모도 2009년 1,062억 달러에서 2014년 1,983억 달러로 성장했다.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할 경우 당장 대만 경제가 타격을 받을 수 있어 차이 당선자도 마음대로 할 순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자신을 지지해 준 민심을 외면할 수도 없다. 민진당을 지지한다는 천(陳ㆍ58)모씨는 “우리 조상은 200여년전 대륙에서 대만으로 넘어왔다”며 “중국이 대만을 통일하겠다는 것은 영국이 미국을 통일하겠다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차이(蔡ㆍ65)모씨도 “한국이 독재 국가 북한을 좋아할 수 없듯 대만도 독재 국가 중국을 좋아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민심을 달래고 민진당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국가 지도자로서 한 나라를 책임지고 이끌어야 하는 과제가 차이 당선자 앞에 놓였다. 타이베이=박일근특파원 ik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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